항목 ID | GC069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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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民獻先生墓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and Tomb of Master Yoon Minh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5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윤민헌의 묘.
[개설]
윤민헌(尹民憲)[1562~1628]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이다. 할아버지는 윤지함(尹之諴)이고, 아버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이다. 어머니는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딸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안산군 초산면 궤곡리[지금의 시흥시 산현동] 출신으로 1609년(광해군 1) 증광시(增廣試)로 관직에 나아가 1618년(광해군 10) 대동찰방(大同察訪)에서 해임되어 돌아와 살다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가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궤곡리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의정부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 성혼의 가르침을 받아 자성(資性)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시를 잘 지었다. 그리고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스스로 익혀서 해서(楷書)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건립 경위]
본래 파평 윤씨(坡平尹氏) 세장지(世葬地) 안산군 초산면 궤곡리 깨골마을 선조(先祖)의 무덤 곁에 장사를 지냈고, 1647년(인조 25)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가 죽어 묘를 따로 썼다가 1648년(인조 26) 지금의 선조 무덤 오른쪽 산기슭에 함께 이장하였다.
[위치]
윤민헌 선생 묘는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53번지에 있다. 아버지 윤엄 묘 남측 맞은편 깨골마을 뒷산 언덕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아래 남서향으로 증조할아버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과 손자 충정공(忠正公) 윤지완(尹趾完)의 위패를 모신 영충사(鈴忠祠)가 있다. 물왕동에서 화정동으로 가는 금화로 변 깨골마을 피울길로 들어서서 금화로202번길로 남서쪽으로 들어서면 좌측 언덕에 있다.
[형태]
묘역에는 옛 석물로 혼유석(魂遊石), 상석, 고석(鼓石), 향로석이 있으며 높이 2.05m의 팔각 망주석은 별도로 만들어진 대석 위에 운각(雲角)과 염의(簾依)가 조각된 주신(柱身)을 세워 놓았다. 봉분은 연안 김씨와의 합장이며 묘역에 묘표를 설치하지 않고 묘소 아래에 시흥시 관내에서 가장 큰 묘갈(墓碣)[높이 3.45m]을 세웠다. 양식은 숙종 대 크게 유행하던 방부개석(方趺蓋石)이다. 높이 2.37m의 비신(碑身)은 갈색 대리석이다.
비신의 전액(篆額)은 '증좌찬성 행공조참의 윤공묘갈명(贈左贊成行工曹參議尹公墓碣銘)'이라 썼고, 전자(篆字) 글씨 크기가 10~13㎝이다. 비제(碑題)는 '유명조선국 증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지 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정대부 공조참의 윤공묘갈명(有明朝鮮國贈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政大夫工曹參議尹公墓碣銘)’이라고 하여 비석의 종류가 묘갈임을 밝히고 있다. 건립 연대는 '숭정 기원후 82년 기축[1709년] □월 □일 립(崇禎紀元後八十二年己丑□月□日立)’이다.
윤민헌이 생전에 쓴 명(銘)을 먼저 새기고, 이어 손자 윤지완이 약전(略傳)을 지어 붙여 손자 평안도관찰사 윤지인(尹趾仁)이 썼다. 전(篆)은 비신의 앞뒤로 함경도관찰사 윤덕준(尹德竣)이 썼다. 묘갈문의 큰 해서자(楷書字)의 크기는 4~5㎝이다.
[현황]
2002년 3월 15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윤민헌 선생 묘는 조선 중기의 묘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묘갈은 시흥시 관내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고 숙종 대에 크게 유행한 양식이며 전액은 경서와 문장, 전서 등 여러 글씨를 잘 써 사대부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남긴 윤덕준의 글씨로 서예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