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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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維先生墓-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and Tomb of Jang Y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권 |
조성 시기/일시 | 1638년 - 장유 묘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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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87년 12월 25일 - 장유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638년 3월 17일 - 장유 사망 |
이장 시기/일시 | 1664년 - 장유 묘 이장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3월 3일 -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97년 8월 17일 - 1797년 8월 정조 행차 시 치제를 지냄. |
현 소재지 |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5 |
원소재지 | 장유 묘 -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상양산 덕수 장씨 세장지 |
성격 | 묘소와 신도비 |
관련 인물 | 장유|정경부인 밀양 박씨|효종|인선왕후|장선징|현종|숙종|정조|송시열|심익현|김만기 |
문화재 지정 번호 |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의 묘와 신도비.
[개설]
장유(張維)[1587~1638]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判尹)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고,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 1) 문과 급제 후 대사헌, 대사간,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효종의 국구(國舅)[장인]가 되어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파직되자 안산[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안골]에 내려와 해장정사(海莊精舍)를 짓고 12년을 살았다. 이때 아들 장선징(張善澂)과 인선왕후를 낳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말년을 보냈다.
[위치]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5에 있다. 쇠머리산 정상의 아들 풍양군(豊陽君) 장선징 묘 맞은편 동북쪽 언덕에 있다. 뒤쪽 언덕에는 아버지 장운익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또한 북쪽에 1650년(효종 1) 인선왕후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다는 법련사(法蓮寺)와 조남동 측백나무가 있다. 시흥시에서 인천광역시로 가는 국도42호선 오른쪽으로 장군재마을로 들어서서 수인로2216번길로 올라가면 응달말 뒤편으로 뻗어내린 수암봉의 낮은 언덕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변천]
묘는 처음에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산69-2] 상양산 자락의 선영이 있는 덕수 장씨(德水張氏) 세장지(世葬地)에 썼다. 지금도 그 자리에 봉분이 없이 석물 등이 남아 있다. 이후 1664년(현종 5) 외손(外孫) 현종이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장군재는 효종의 국구였던 장유의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려주는 토지]로서 마을 이름은 그의 성씨와 군호(君號)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형태]
묘역에는 옛 석물로 혼유석(魂遊石), 상석이 있으며 문양이 화려하고 조형 감각이 뛰어난 높이 1.8m의 망주석 한 쌍과 금관조복(金冠朝服)의 문인석 두 쌍[높이 1.17m, 1.9m]이 세워져 있다. 귀면(鬼面)이 새겨진 고석(鼓石)과 향로석은 분실되어 새로 설치하였으며 봉분에 호석(護石)도 설치되었다. 봉분 앞에는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의 높이 2.03m의 묘표(墓表)가 건립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방부에는 당초문(唐草紋), 복련(覆蓮)과 연주(連珠)를 조각하였으며 백(白)대리석 높이 1.5m의 비신(碑身)을 세웠다.
또한 묘에서 서쪽으로 70m쯤 떨어져 있는 곳에 귀부개석(龜趺蓋石) 양식을 갖춘, 높이 4.88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신도비가 세워졌다. 가로 6.45m, 세로 7.13m의 기단을 마련하고 높이 1.36m, 길이 4.4m, 폭 2.46m의 귀부(龜趺) 아래에 팔각형의 지대석(址臺石)을 갖추었다. 귀두(龜頭)는 정면을 보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고, 귀갑(龜甲) 위에 하엽좌대(荷葉座臺)를 마련하고 위로 비신을 세웠다. 팔작지붕의 개석(蓋石)을 올리고 용마루에 두 마리의 용이 똬리를 틀고 앉은 모습을 조각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신도비이다.
[금석문]
묘표는 비신 전면에 ‘정사공신 의정부우의정 신풍부원군 증익문충 장공지묘 영가부부인김씨 부좌(靖社功臣議政府右議政新豊府院君贈謚文忠張公之墓永嘉府夫人金氏祔左)’라 쓰고, 뒷면에 음기(陰記)는 아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장선징이 짓고 병조판서 김좌명(金左明)이 썼다. 마모가 심하나 판독이 가능하다. 우측에 건립 연대는 ‘숭정기원 무진후 37년 갑진[1664년] 구월 □일 립(崇禎紀元戊辰後三十七年甲辰九月□日立)’이다.
신도비는 전액(篆額)을 ‘의정부우의정 문충 장공신도비명(議政府右議政文忠張公神道碑銘)’이라 올렸다. 비제(碑題)를 '유명조선국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행 분충찬모입기 정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신풍부원군 문충 계곡장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新豊府院君文忠溪谷張公神道碑銘幷序)'라고 하여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翼顯)이 썼다. 전액(篆額)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가 올렸다. 입석 연대는 '숭정기원 무진후 병진[1676년] 10월 □일 립(崇禎紀元戊辰後丙辰十月□日立)'이다.
[현황]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는 조선시대 분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장유 선생 묘의 망주석은 당대의 기준작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신도비는 효종의 부마(駙馬) 심익현의 글씨로 조선화된 송설체(松雪體)인 촉체(蜀體)를 매우 잘 써 서예사에 중요한 자료이다. 신도비의 개석 장식이나 전체적인 규모와 양식 면에서 숙종 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으로 조선시대 신도비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