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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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鳥南洞社稷壇址 |
영어공식명칭 | Jonam-dong Sajikdan Site |
이칭/별칭 | 조남동 사직단 터,안산군 사직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방문식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2년 3월 15일 - 조남동 사직단지 시흥시 향토유적 제1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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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71 일대 |
성격 | 제단 |
관리자 | 시흥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향토유적 제15호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조선시대 안산군의 사직단 터로 전하는 유적.
[개설]
사직단(社稷壇址)이란 사(社)와 직(稷)의 두 신을 모신 제단이다. 사는 토지신, 직은 곡물신을 말한다. 땅과 곡식은 고대 농업국가에서 생존과 번영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널리 숭배되었다. 사직단은 기원전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도 기록이 있지만 본격적인 도입은 고려 6대 왕 성종 때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지방에도 사직단이 건립되었고, 현재 시흥시 조남동에 남아 있는 사직단 터도 당시 지방 사직단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변천]
사직단은 기원전 중국 주나라 이전부터 토지신과 곡물신을 제단에 모시면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직단은 왕조가 내려오면서 의례가 점차 규격화되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사직을 왕궁 주변에 두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사직 제도가 도입된 것은 고려 성종 때부터이다. 고려 성종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해 중국적 예제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983년(고려 성종 10)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는 태조 때부터 경복궁을 중심으로 “사직은 오른쪽, 종묘는 왼쪽(右社左廟)”이라 하여 한양의 서부 인달방(仁達坊)[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태종과 세종 대를 이은 사직 제도에 대한 논의는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오례(五禮)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반영되었다. 조선시대 지방에서는 1406년(태종 6) 명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근거로 지방행정 단위의 필수 시설로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황사(城隍祠), 제사를 받지 못하는 여귀(厲鬼)를 모신 여단(厲壇)과 함께 사직단을 두었다.
조남동 사직단지는 조선시대 안산군(安山郡)의 치소(治所) 부근에서 발견되어 조선시대 지방 사직단 제도가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안산군 사직단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군의 서쪽 3리[약 1.2㎞]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군은 치소 혹은 관아(官衙)를 말한다. 안산읍성 및 관아는 처음에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성안마을에 있다가 1441년(세종 23) 이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으로 옮겨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합하면 안산군 사직단은 수암동 서쪽에 있으며, 현재 발견된 사직단 터는 시흥시와 안산시 경계선 부근에 있어 기록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치]
조남동 사직단지는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71 일대로 시흥시와 안산시의 경계선 부근 야산 정상부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현재 제단을 둘러싼 흙 담장과 내부에 흙이 무너지지 않게 석축으로 쌓은 것으로 짐작되는 정방형(正方形)[정사각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담장은 네 면이 모두 약 13m의 정사각형이며, 각 면이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나 전체적인 방향은 약 20도 틀어진 상태이다. 사직단 내부는 외곽보다 30~50㎝ 함몰되었으며 외곽부의 안쪽에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토단(土壇)이 무너지지 않도록 폭 1m 정도의 석축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직단 각 면의 중간 부분에 약 2m 정도 함몰된 부분이 있는데, 네 방향에서 정상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이하게 사직단 터의 중심부에서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기와로 대체로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외면은 민무늬가 대부분이다. 사직단이 기본적으로 노천 제단이었음을 생각할 때 기와 조각이 출토되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있다.
[현황]
조남동 사직단지는 시흥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시흥시와 안산시 경계선 부근 야산 정상부에 있고 사직단 터와 주변에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접근성이 떨어진다.
[의의와 평가]
조남동 사직단지가 온전한 형태가 아니고 전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료가 남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사직단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방의 의례 문화의 흔적으로 남겨지기까지 과정을 증빙하는 유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시흥시가 안산시와 더불어 지역의 치소이자 거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동질성과 연원을 되짚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