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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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齊斗 |
영어공식명칭 | Jeong Jedu |
이칭/별칭 | 사앙(士仰),하곡(霞谷),추곡(楸谷),문강(文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원철 |
출생 시기/일시 | 1646년 6월 27일 - 정제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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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36년 8월 11일 - 정제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43년 - 영조가 정제두에게 시호 문강(文康) 하사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11월15일 - 추곡 정제두 선생 유허비 설립 |
출생지 | 한성부 반석방 |
거주|이주지 | 경기도 안산군 인화면 화정리 가래울마을 |
거주|이주지 | 경기도 강화도 양모면 하일리 |
묘소|단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5 |
사당|배향지 | 경기도 시흥시 화정동 735 가래울마을 큰 우물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일 |
대표 관직|경력 | 평택현감|대사헌 |
[정의]
경기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마을에 거주했던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한국 양명학의 대종사.
[개설]
정제두(鄭齊斗)[1646~1736]는 학자로서 평생 학문을 연구하며 살았다. 잠시 평택현감과 회양도호부사로 부임하고 영조의 총애를 받아 이조참판, 대사헌,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등의 요직에 기용되었지만 지속적으로 사퇴를 청하였다.
정제두는 양명학을 사문난적(斯文亂賊)[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으로 규정한 조선 사회에서 당당하게 양명학의 종지(宗旨)를 따르고 있음을 천명하였으며, 지인 및 스승의 거듭되는 논변에 맞서 자신의 종지를 지키며 저술을 통하여 한국 양명학의 체계를 세웠다. 한편 심학(心學)을 바탕으로 하여 경학을 해석하였다. 정제두는 심학으로 공맹 유학(孔孟儒學)을 해석하였으나 현실 정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조선 21대 왕 영조의 부름에 응하여 조언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추곡(楸谷), 시호는 문강(文康).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는 영일 정씨(迎日鄭氏)의 11세손이다. 정제두는 한성부 반석방(盤石坊)에서 태어나 5세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 정유성(鄭維城)의 슬하에서 자랐다.
정제두는 41세에 6대조 정광윤(鄭光胤)이 안산군에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입향하여 세거한 가래울마을로 이전하여 20년간 거처하였다. 61세에 강화도로 이주하여 가학으로 양명학을 전승하였다.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鄭厚一)이 학문을 이었으며, 현손(玄孫) 정문승(鄭文升)이 『하곡집(荷谷集)』 22권을 필사본으로 정리하였다. 가래울마을에는 6대조 정광윤, 5대조 정운, 4대조 정귀웅, 3대조 정열, 증조할머니 황씨부인의 유택이 있다. 조부 정유성(鄭維城)과 아버지 정상징(鄭尙徵),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묘는 강화도 진강리에 있다.
[활동 사항]
정제두는 20세부터 초시(初試)에 여러 번 붙었으나, 24세부터는 과거를 접고 순수 학문 연마에만 주력하였다. 가래울마을에서 20년간 한국양명학의 체계를 세우고, 61세부터 사망할 때까지는 강화도에서 가학으로 전승하며 『심경집의(心經集義)』와 『경학집록(經學集錄)』 등을 저술하였다. 일생에 걸쳐 사대부의 천거와 왕명으로 벼슬을 끊임없이 제수받았으나 출사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41세에 평택현감에 잠시 부임하고, 48세에 서연관(書筵官)으로 뽑혔으나 사퇴하였다. 63세에 회양도호부사로 잠시 부임하였다가 사직하였는데, 전송하는 이가 수십 리 길에 이르렀으며, 도호부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세워서 공적을 추모하였다. 71세에 한성부 좌윤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74세인 1722년(경종 2)에 사헌부대사헌과 세자시강원찬선, 이조참판에 임명받았지만 사퇴를 원해 다음해 사퇴가 허락되었다. 76세에 성균관좨주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79세인 1726년(영조 2) 다시 이조참판을 제수받았다. 그해 다시 동궁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찬선과 사헌부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80세인 1728년(영조 4) 2월에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받은 후, 3월에 역변이 일어나자 5월 초까지 서울에 머물며 영조와 수시로 대화를 나누고 강(講)하였다. 의정부우참찬 사임의 소는 5월에 수리되었다. 그해 11월에 다시 사헌부대사헌으로 임명되어 사직을 원했으나, 그 역시 다음 해 3월에야 사직의 소를 받아들였다. 82세에 성균관좨주 직을 임명받았으나 사양하여 퇴직하였다. 그해 6월 영조는 어의로 하여금 선생이 강화로 돌아가는 길을 수행하게 하였다. 정제두는 84세에 자신의 수기(壽器)를 만들었는데, 그해 영조는 쌀과 고기, 타락죽(駝酪粥)을 하사하여 지속적인 애정과 신뢰를 표했다. 86세인 1734년(영조 10) 3월에 지중추부사와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받았다. 정제두는 4번이나 소를 올려 퇴직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87세에는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임명받았으며 88세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명 받았으나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정제두는 조선 성리학에서 이단이라는 양명학을 하고 있음을 세상에 천명하고, 지인 및 스승과의 양명학 논변을 수십 년간 주고 받으면서 몇몇 저술을 하였다. 강화도로 이주하여 88세로 사망하기까지 영조의 총애를 받아 궁중을 드나들며 강론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제두의 학문은 유년의 주자학 공부를 중·장년 들어서 양명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가래울마을 시절에는 한국 양명학의 유일한 저서인 『존언(存言)』을 저술하였다. 강화도 거주 시기의 노년에는 유학의 본뜻을 기리는 경학과 심학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저서로는 양명학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받아들여 저술한 『학변(學辨)』, 『존언』 외에도 경전 주석서인 『중용설』, 『대학설』, 『논어설』, 『맹자설』, 『삼경차록(三京箚錄)』, 『경학집록』, 『하락역상(河洛易象)』이 있다. 또한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인 『심경집의(心經集義)』, 『정성서해(定性書解)』, 『통서해(通書解)』 등이 있다.
[묘소]
정제두의 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5번지에 있으며 2007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등록되었다. 묘비는 1803년에 세웠으며 상석과 장명등(長明燈), 문인석이 있다. 비문은 신대우(申大羽)가 짓고 서용보(徐榮輔)가 썼다.
[상훈과 추모]
정제두는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 사회에 새로운 학문의 바람을 일으킨 선구적 사상가이다. 시흥시와 시흥문화원은 정제두의 학문적 업적을 기려 2017년 11월15일 시흥시 화정동 735번지 가래울마을 큰 우물가에 '추곡 정제두 선생 유허비'를 세워 한국 양명학 대종사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