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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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眞率會 |
영어공식명칭 | Jinsolhoe(Association) |
영어음역 | Jinsolhoe(Association) |
영어공식명칭 | Jinsolhoe(Associ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 있었던 지역 지식인 친목 단체.
[설립 목적]
순천에 유배온 조위(曺偉)[1454~1503]는 서문 밖의 인가에 우거하였다. 조위는 자신의 거처와 가까운 곳에 있던 임청대에서 순천 지역의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조위를 중심으로 모여든 지식인들은 진솔회를 결성하였다. 결성 모임 이름에서 모임의 목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솔회’는 중국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벼슬을 그만두고 뤄양[洛陽]에 있으면서 뤄양 지역의 고로(故老)들과 만든 모임 이름이었다. 진솔회의 규칙은 술은 다섯 순배 이상을 돌리지 못하고 음식은 다섯 가지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원래 진솔회는 일종의 기로회(耆老會)로서 지역의 원로들이 퇴임 이후 여유롭게 담론하는 모임이었다. 허례허식을 버리고 진솔하게 만나 속세의 이끗에 얽매이지 않는 모임이요, 담담한 가풍과 도의의 사귐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이와 비슷한 성격의 모임을 만들고, ‘진솔회’라고 명명하는 사례가 자주 보인다. 고려시대 때 최자(崔滋)가 서문을 쓴 「해동후기로회서(海東後耆老會序)」에 보면, 78세로 보문각 직학사로 치사(致仕)[70세가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장자목(張自牧) 등 9명이 사마광의 진솔회를 본떠 해동기로회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경상북도 안동에도 1478년(성종 9)부터 고성이씨 등 여러 문중의 50, 60대 사대부 13명이 ‘우향계(友鄕契)’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후속 모임을 진솔회라고 하였다. 윤증이 쓴 민도(閔燾)의 묘갈명에도, 민도가 1679년(숙종 5) 치사한 뒤에 진솔회를 만들어 내외종 형제들과 단란하게 술을 마시며 온종일 즐겁게 보냈다고 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지은 시에도, 성호 이익이 진솔회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진솔회의 활동은 조위가 쓴 「임청대기」에 잘 나온다. “내가 승평에 이르러 서문 밖에 붙어 살았는데 내 집에서 [임청대까지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고을의 여러 사람과 함께 그곳에 자주 가곤 했었다. 그래서 거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이름하여 임청이라 했다. 주인 심종유(沈從柳)와 양우평(梁禹平)·한인수(韓獜壽) 및 향교 교관 장자강(張自綱)과 함께 진솔회를 만들었는데, 모임이 있는 날엔 돌아가며 밥과 산채에 술 한 병을 장만케 하고, 시내 물고기를 잡아서 국과 회를 마련했다. 시간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칙이 있었다. 식후에는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뒤에 마시기를 그치면 서로 권하는 일이 없었으며, 간결 검소하고 쉽게 준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때로는 바둑을 두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흩어졌다.”라고 적혀 있다. 사마광이 만든 진솔회의 목적과 일치하는 활동 양상을 보인다.
[의의와 평가]
진솔회는 조위가 지역의 원로들과 담론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젊은 장자강(張自綱)과 같은 인물이 어울린 것이었다. 조위와 같은 대학자가 지역의 젊은 관료와 함께 담론을 나누는 기회를 자주 가짐으로써, 지역 젊은 학자들에게 끼친 문화적 충격과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진솔회는 이후 순천 지역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