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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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창언 |
[개설]
차가 많이 난다고 하여 ‘다전’, ‘다중’이라고도 하는 산운 마을은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로 수정 1동·수정 2동과 산운 1동으로 구분된다.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 군위군이 있고 북쪽으로는 의성군이 있는 중간 위치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빙계 서원으로 이어진다. 마을 뒤쪽으로는 금성산과 비봉산이 위치하고 앞쪽으로는 대평천[마을 주민들이 쌍계천을 부르는 별칭]이 흘러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상 길지인 이곳은 주변이 탁 트여 있어 벼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곳이다.
[구름이 감도는 곳에 위치한 산운]
산운 마을이 속해 있는 금성면은 옛 조문국의 도읍지로서 조문면, 역곡면, 산운면, 상천면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역곡면은 조문면에 상천면은 산운면에 각각 병합되었다. 그러던 중 1934년 2월 1일 리동 명칭 및 구역 변경에 따라 산운면, 조문면 두 면을 통합해 금성면으로 개칭되었다.
1934년에 산운면, 조문면을 합하여 1개 면으로 구성, 면 명칭을 정할 때 두 면의 유지가 의논하여 산조, 조산 등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금성산이 유래가 깊고 조문국 시대의 요새지로서 면 전체가 그 산 아래 있어 금성면이라 칭하였다.
이처럼 산운 마을은 금성산과 비봉산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대평천이 흐르고 있다. 풍수지리상 길지에 속하며 전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현이 나오는 땅이라 불리어진다.
[영천 이씨의 고장 산운 마을]
산운리는 1599년 이광준에 의해 개척되어 다중(茶中), 다전(茶田)이라 하였으며 1934년 산운 1동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과거에 차가 많이 재배되어 다중, 다전으로 불리게 된 것이나 이는 추측일 뿐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산운 마을은 마을 위쪽에 있는 수정사를 의상 대사가 건립한 것으로 보아 불교 위주의 신라 및 고려 시대에 마을이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장씨, 의성 정씨, 능성 구씨, 수원 백씨가 마을을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단양 우씨, 아주 신씨가 들어와 각성 촌락이 형성되었다. 영천 이씨의 입향조인 감사공 학동 이광준이 들어오면서 타 성씨들은 모두 나가고 현재의 산운 마을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현재에는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450여 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산운 마을에는 영천 이씨의 유래에 관한 하나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과거 가음면 순노리에 처가살이로 지내던 감사공은 활 연습을 하기 위해 산운 마을 근처를 지나던 중 동자승과 스님이 길목에서 오줌을 누며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동자승이 ‘스님 이곳을 보니 성현이 나타날 곳인 것 같습니다.’라고 스님에게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주인이 듣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감사공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현재 산운 마을에서 뒷동산, 뒷거릉이라는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영천 이씨가 현재의 산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이러한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감사공은 156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 강릉 부사가 되었다. 부임 초 임진왜란이 일어나 많은 적의 목을 베고 공을 세워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통정대부로 올려 주었다. 감사공은 1603년(선조 36) 형조 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더 이상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하였다. 저서로 『학동일고』가 있다. 감사공의 두 아들 또한 훌륭했으니 형 경정 이민성은 1597년(선조 30)에, 아우 자암 이민환은 1600년(선조 33) 문과에 급제했다. 경정은 승문원 정자를 거쳐 1602년(선조 35)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옥당에 뽑혔다. 그러나 아버지상을 당하여 귀향하여 여묘 3년을 마치고 교리, 세자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했다. 인목 왕후를 폐비시키려고 할 때 이를 반대하다 벼슬을 잃고 고향에 내려온 뒤로 10여 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했다.
인조반정 후에는 사헌부 장령에 복직했다.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잘 이해시킨 공로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 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어 전주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인조 7)에는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해 죽었다. 또한 직언을 잘했으며, 의리에 강했다. 이외에도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들이 이태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가 1천여 수에 이르며 장대 서원에 제향되고 저서로 『경정집』, 『조천록』 등이 있다.
아우 자암은 1603년(선조 36) 평안도 암행어사를 역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 호소사 장현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했다. 난이 끝난 뒤 동래 부사로 나가 선정을 펼치고는 호조 참의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645년(인조 23)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저서로 『건주견문록』, 『자암집』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간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이들 삼부자가 산운 마을의 기반을 굳혔고 7대손인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이 세를 더욱 확장하여 1795년(정조 19)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의 초계문신에 발탁되었으며, 순조 때 대사간, 헌종 초기에 승지가 되었다. 1847년(헌종 13) 병조 참판으로 국방 태세를 잘 확립하여 1849년(헌종 15) 형조 판서로 승진, 한 나라의 군정을 바로잡는 중책을 맡았으나 곧 병이 들어 물러났다. 시호는 희정이다.
[양반 문화의 정수 산운 마을]
산운 마을은 조선 명종,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광준을 입향 시조로 400 여 년을 세거해 온 영천 이씨 감사공파 집성촌이다. 입향 시조로부터 내리 3대가 급제하였으며, 경산 이태직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도 많이 배출했다. 이 마을이 대감촌, 또는 양반 마을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경상북도 북부의 유교 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마을 전체 건축물을 보수하였다. 이에 고택 40여 호를 통해 양반 마을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산운 마을의 농경지는 위로는 금성산과 비봉산에서 아래로는 대평천에 이르기까지 큰 농경지를 가지고 있다. 1970년까지 벼와 보리, 콩을 재배하여 생활해 왔으나 현재는 마을 주민들의 이주와 고령화로 인하여 벼보다는 과수 농사 위주로 재배하고 있다. 대체로 큰 수익보다는 생활에 필요한 정도만 생산한다. 마을 주민들은 대체로 의복에 한해 평상복과 작업복의 큰 구분 없이 입고 있으나 향사나 기제사를 지낼 때에는 의례복으로 갈아입는다. 의례복으로는 삼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쓴다.
산운 마을의 양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향사는 매년 2회 지낸다. 향사는 매년 4월 첫째 주 토요일에 지내며, 학록 정사에서 삼부자인 학동과 아들 경정, 자암을 위한 불천위 제사이다. 둘째 주 토요일에 지내는 향사는 운곡당에 있는 정자에서 희정공을 위한 불천위 제사이다. 매년 향사를 2회 진행하며, 제비로는 32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향사의 비용은 회비와 후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제수 물품으로는 밤, 대추, 조기, 명태포, 육적, 돔배기, 삶은 돼지고기, 오징어, 황태포, 참외, 감, 오렌지, 바나나, 배, 사과, 딸기, 수박, 시루떡, 전, 두부, 삶은 닭, 법주, 시금치,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삼탕 등이 들어가고, 제기는 보관해 오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향사는 전해져 내려오는 홀기에 적힌 순서대로 진행하게 된다. 학록 정사에서 진행하는 향사를 예로 든다면, 먼저 향사 준비를 한다. 제수 음식을 상 3개에 차려 올리고, 헌관과 참사자들은 계단 밑에 선다. 그 다음 개식문을 낭독하며 향사를 시작한다. 홀기에 적힌 대로 창 홀, 참신례,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순으로 진행한다. 이렇게 향사에 참여하는 인원수는 100명 정도이며,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고가옥의 풍미가 느껴지는 산운]
산운 마을은 정중앙이 점우당, 그 위가 운곡당, 왼쪽 위가 소우당이 위치해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산운 마을은 마을 주민들이 뒷거릉, 뒷동산이라 부르는 현재의 마을보다 위쪽에 살고 있었으나 영천 이씨가 들어오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2012년 현재 160호의 가옥에 주민이 살고 있으며 180명 정도의 인원이 살고 있다. 산운 마을의 행정 구역은 수정 1리·수정 2리와 산운 1리로 구성되었다.
산운 마을에는 중요 민속문화재 제237호로 지정된 소우당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 정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74호로 지정된 운곡당 및 제375호로 지정된 점우당 등 40여 호의 고가옥이 존재한다. 이들 학록 정사, 소우당, 운곡당, 점우당을 사택 고가라 부르고 있다. 산운 마을 전통 가옥의 형태는 대부분 특 ‘ㄷ’자 형과 특 ‘ㅁ’자 형의 건물 구조를 가진다.
1. 학록 정사[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42호]
이 건물은 영천 이씨 산운리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 선생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750년(영조 26)경에 건립하였다. 선생은 1562년(명종 17)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 형조 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는 강릉 부사로서 전공을 세워 당상관에 특진되었다. 강당 왼쪽 뒤편의 광덕사에는 삼부자인 학동 이광준, 경정 이민성, 자암 이민환의 불천위를 합사하고 있고 정면 우측에는 관리사를 두었다.
학록 정사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으로 팔작지붕과 문틀 등이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학록 정사의 현판은 표암 강세황의 필적이다. 동쪽 유의(由義)는 ‘옮음을 따르라’, 서쪽 거인(居仁)은 ‘어질게 살아라’란 뜻이다. 학록 정사 입구의 소시문(蘇始門)은 원래 이 마을이 소시랑골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해서 이름 지어졌고, 소시랑골은 소씨가 시랑이란 벼슬을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2. 소우당[중요 민속문화재 제237호]
소우당은 소우(素宇) 이가발(李家發)이 19세기 초에 건립하였고, 안채는 1880년대에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소우당의 대문을 통해 진입하면 사랑채의 입면이 대문간 채와 평행을 이루며 시선을 가로막고 있어 자연스럽게 좌측에 있는 원림으로 연결되는 협문으로 동선을 이끈다. 연못과 안사랑 채라 불리는 건물 주변으로는 소나무들과 기암괴석들이 있으며, 원림에서 가옥의 후면으로 통하는 협문을 나오면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모서리를 틔우며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협문의 위치로 보아 원림이 남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안주인을 비롯한 여자 식구들도 사용하였던 곳으로 여겨진다. 집에는 음기가 강해 남자들이 장수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원 한쪽 옆에 남근석을 꽂아두어 음양의 조화를 바랐다고 전해온다. 또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여러 개의 돌비석을 병풍처럼 둘러놓았다고 한다. 소우당은 별서 건축 연구에 더없이 좋은 건축물이라는 학계의 평가 속에 학자들과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3. 운곡당[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74호]
이 건물은 현 소유주 이목의 5대조인 운곡 이희발[1768~1849]이 영월 부사로 재직하던 1800년대 초기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집이다. 북쪽에 솟은 금성산을 뒤로하고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안채에는 사랑방 고방 등이 한 동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평면 구성은 ‘ㅁ’자형인데 앞채의 좌우에 전면으로 나와 있어 날개집의 한 유형에 속한다. 안채의 왼쪽과 뒤쪽에는 사당이 있고 문간채는 한말에 소실되었다. 평면 형태는 ‘ㄷ’자 형태의 안채와 그 앞 좌측에 ‘ㄱ’자형의 사랑채, 우측의 ‘ㄱ’자형의 고방 채는 중문간을 통해 연접되어 ‘ㄷ’자형을 이루어 안채와는 상하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운곡당은 특히 내외담 또는 차면담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3m, 높이 2m 정도의 담장이 안채 입구에 쳐져 있다. 이는 사랑채를 찾아오는 손님이 대문으로 들어올 때 안채의 아녀자들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안채의 마루는 높이 만들어 사랑채 손님으로 누가 오는 지를 볼 수 있도록 해놓은 점이 특이하다.
이렇게 운곡당은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기도 하였으나, 이 마을의 고가 중 대표적인 건물이라 볼 수 있다. 이에 4월 둘째 주 토요일이 되면 운곡당의 주인인 이희발을 위한 희정공 향사를 지내는데, 여기에는 희정공인 이희발의 후손들이 참가한다.
4. 점우당[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75호]
점우당은 현 소유주인 이병직의 증조부인 죽파 이장섭이 1900년경에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건립 연대로 보아 소우당, 운곡당 보다 약 100년 정도 후 건립되었다. 점우당은 산운 마을 입구 평지에서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운곡당과 담장을 공유하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연결되어 ‘ㄷ’자 형의 평면을 이루고 맞은편에 ‘ㅡ’자형의 헛간채가 있어 ‘튼ㅁ’자 형의 평면 구성을 이룬다. 또한 남동쪽으로는 대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우측으로 아궁이 방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으며, 운곡당의 내·외담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ㅁ’자에 가까운 배치를 통해 1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남녀 간의 사회적 공간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점우당의 개방적인 건물 배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도약 산운 생태 공원]
산운 마을은 양반 마을로서의 특성만을 내세우지 않고 마을의 역사를 홍보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생태 공원을 기획하였다. 단순히 양반 마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관광객들을 위한 의미 전달이 어렵기 때문에 홍보관을 기획하였다. 또한 마을 주변의 자연을 부각시키기 위한 생태 공원도 마을의 생성에 어울리며, 현재 폐교된 산운 초등학교가 위치했던 자리를 2001년부터 2006년에 걸쳐 자연 학습장 및 친환경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생태관에는 의성군 유래와 특산품 관광 코스 및 지역 행사를 알 수 있는 홍보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지진과 생명의 기원, 지구의 탄생을 전시한 전시실1, 인류의 진화 과정과 동·식물의 분포를 전시한 전시실2, 공룡의 연대기와 화석을 볼 수 있는 전시실3, 산운 마을의 유래와 문화재를 전시한 마을 자료관 등이 있다. 밖에는 50여 종에 이르는 나무와 풀·꽃 등을 키우며, 연못·분수·산책로 등을 조성하여 관람객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또한 산운 마을의 동쪽으로는 가음면의 빙계 계곡이 있어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으며, 많은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산운 생태 공원을 준공하였을 당시에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 방문객들이 큰 불편을 가졌다. 산운 마을 주민들도 방문객의 수가 증가하자 자신들이 동물원의 동물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차의 먼지가 집으로 들어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도로를 포장하고, 마을 하천을 정비한 후에는 불편들이 사라졌으며, 마을을 홍보할 수 있는 장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불편한 점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관광지로 지정되었지만 실제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모두 지원이 돌아가는 것이 아닌 고택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이다. 또한 지원비도 고택 수리비 정도라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후에는 산운 마을의 고가 체험과 산운 생태 공원을 발전시켜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하회 마을과 같은 큰 관광지로 도약하는 것이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