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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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백지국 |
향교 | 의성 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808 의성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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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 박연백의 생가지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376 |
학교 | 비안 공립 보통학교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산 4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정의]
한말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경상북도 의성 출신 또는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말 의병 관련 인물]
의성 지역 한말 의병 활동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는 의병장 김상종(金象鍾), 초모장 김수욱(金壽旭), 중군 권대직(權大稷), 선봉장 김수빙(金壽聘), 관향장 김수협(金壽莢)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수학하던 유생들로 전투 경험이 없고 무기마저 일본군에 비해 열악하였던 탓에 결국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梧上里) 출신의 이필곤(李苾坤)도 1896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춘산면의 사미(思美)와 옥산면의 황산(黃山)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칙령에 의해 부대가 해산되었다. 1907년 의병장으로 활동한 것을 이유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된 뒤 안동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8월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孝仙里) 출신 박연백(朴淵伯)은 1906년 팔공산에서 기병하였고, 의성·금성·의흥·신녕·영천·영일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 외에도 일제의 각종 의병 관련 자료에서는 1907년 11월 25일에 의성에서 약 50명의 의병 부대가 활동을 벌였으며, 1908년 2월에도 의성에서 두 차례 의병 부대가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의성 출신으로 조용필·조용구 등이 이강년(李康秊)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3·1 운동 관련 인물]
의성 3·1 운동은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쌍계리(雙溪里)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가장 먼저 일어났다. 비안 공립 보통학교 만세 운동은 박만녕(朴萬寧)·정인성(鄭寅成)·박기근(朴基根)·우희원(禹熙元) 등의 주도하에 계획되었다. 이를 미리 눈치 챈 교장이 3월 12일 아침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주도자를 교장실로 데려가 시위를 일으키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학생들은 산으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박만녕을 비롯한 4명도 교장실에서 뛰어나와 만세 대열에 합류하였다. 만세 소식에 비안 주재소 순사들이 도착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흩어지고 우희원·박기근·정인성 3명은 그 자리에서 검거되었다. 우희원·박기근은 징역 8개월, 정인성은 징역 6개월에 처해졌다. 박만녕은 검거를 피해 다니다 1921년 체포되어 징역 3개월을 받았다.
쌍계리 만세 운동은 쌍계 교회의 박영화(朴永和) 목사가 이끌었다. 평양에서 돌아온 괴산 교회 김원휘(金原輝) 조사로부터 만세 소식을 들은 박영화는 동생 박영신(朴永新)과 배달근(裵達根)·배중엽(裵重曄) 등과 만세 운동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은밀히 거사를 계획하는 한편 배도근(裵道根)·이일만(李一萬)·김명출(金明出)·박세길(朴世吉) 등을 새롭게 참여시켰다. 만세 날을 3월 13일로 정한 이들은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일 하루 전인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펼쳐 사전에 해산당하였다. 강제 해산 당한 학생들이 온 동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치자 사람들은 곧바로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박영신·배중엽은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마을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150~200여 명의 군중 가운데는 학생도 50여 명 있었다. 이들은 동네를 돌다가 교회 뒷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였다. 하지만 오후 4시쯤 의성 경찰서에서 파견한 순사가 들이닥쳐 주도자 박영화 등이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영화는 징역 1년 6개월, 박영신·배중엽·배달근·박영달은 각각 징역 10개월, 김원휘·이일만·김명출·배도근·박인욱·박세길·배용석·배용도는 각각 징역 6개월, 서금이·박충식·최점문·배용운은 태형 90을 언도받았다.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과 쌍계리 주민의 독립운동은 의성 지역 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3월 13일 비안면 동부리, 15일 안평면 대사리, 16일 안평면 석탑리, 17일 사부리, 18일 점곡면 사촌리·서변리·윤암리와 의성읍, 19일 봉양면 도리원, 25일 신평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던 인물은 임재호(林在虎)·박후도(朴後度)·박홍섭(朴洪燮)·김성수(金成守)·손동일(孫東一)·김석근(金碩根)·김옥돈(金玉頓)·이종출(李鍾出)·이화실(李華實)·권사연(權士淵)·권해운(權海雲)·김도식(金道式)·이양준(李良俊)·김유식(金有式)·김성갑(金聲甲)·황금종(黃金鍾)·남규우(南圭佑)·김태호(金太鎬)·김길도(金吉道)[김치옥(金致玉)]·배세태(裵世泰)·정갑이(鄭甲伊)·이수원(李守元)·이흔이(李欣伊)·이남동(李南東)·이맹준(李孟俊)·이본동(李本東)·이만준(李萬俊)·김위창(金渭昌)·남오대(南梧大)·신병섭(申炳燮)·박수석(朴秀碩)·신종환(申宗煥)·이태성(李泰成)·김달식(金達植)·김강아지(金江牙止)·김용준(金龍俊)·신용칠(申用七)·마갑문(馬甲文)·박천수(朴千壽)·김학배(金鶴培)·김기석(金基碩)·이배기(李培基)·박두완(朴斗完)·박수영(朴秀永)·김원휘(金原輝)·이원춘(李元春)·이순근(李順根)·김태선(金兌先)·김지명(金止命)·김치근(金致根)·최달모(崔達模)·김봉수(金奉洙)·김계준(金桂俊)·김순환(金順煥)·전응주(全應珠)·김일석(金日錫)·이봉수(李鳳壽)·이치명(李致明)·이용빈(李龍斌)·최상근(崔相根)·유승필(兪承弼)·이종순(李鍾珣)·이복구(李福求)·이종광(李鍾光)·박낙현(朴洛鉉)·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윤용구(尹龍九)·김군식(金君植)·김자룡(金子龍)·신진수(申震洙)·김천특(金千特)·최경원(崔慶源)·정의진(鄭義鎭)·구남술(具南述)·김덕암(金德岩)·김암우(金岩佑) 등이다.
[청년회 관련 인물]
3·1 운동 이후 의성 지역에서는 의성 청년회(義城靑年會)를 비롯하여 의성 불교 청년회·을축 청년회·소남 청년회(韶南靑年會)·산운 용남 청년회·청년 면려회(靑年勉勵會) 등의 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의성 청년회는 1919년 7월 오진문(吳進文) 등의 발기로 창립되었다. 18세 이상의 의성군에 거주하는 남자라면 모두 입회하여 노년·장년·청년 기타 관공리(官公吏) 서무부(庶務部)·문예부(文藝部)·체육부(體育部)·음악부(音樂部) 등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1925년 기존의 회장제에서 위원제로 개정하고 30세 이하로 연령 제한을 두었다. 관련 인물로는 오달세(吳達世)·정우일(丁又一)·오수혁(吳秀赫)·오병수(吳丙洙)·이기창(李基昌)·오증수(吳曾洙)·김규수(金圭壽)·김규복(金圭福)·오상종(吳相鍾)·오의수(吳義洙)·배수영(裴水永)·오병소(吳秉韶)[기부금] 등이 있다.
청년 면려회는 1935년 의성 교회 청년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청년 면려회는 의성 농우회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1935년 1월 의성 교회 목사로 부임한 유재기(劉載奇)와 청년 면려회의 이재인은 회원과 소년 신도에게 민족의식을 주입시켜 조선 독립 소지를 양성하고자 청년 면려회를 개혁하였다. 이 일로 이재인과 유재기 등은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것이 바로 의성 농우회 사건이다. 관련 인물로는 유재기와 이재인을 비롯하여 김규만·오병수·정석룡·이인영 등이 있으며, 주기철을 비롯한 이유택·송영길 등 신사 참배 반대자들도 검거되어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삼성회 관련 인물]
삼성회(三省會)는 1925년 7월 의성에서 결성되어 계몽 운동에서 사상 단체로 성격을 전환한 의성군의 대표적 사회 운동 단체였다. 관련 인물로 김진봉·김윤배·김현규·오복수·오상경·김진원 등이 있다.
[농민·노동자 운동 관련 인물]
1920~30년대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대중 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의성에서도 안평 농민 조합(安平 農民 組合)과 안계 적색 농민 조합(安溪 赤色 農民 組合) 등이 조직되었다.
안평 농민 조합은 1924년 의성군 안평면에서 소작 농민의 권익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결성된 농민 운동 단체이다. 김상학 등은 소작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평면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를 찾아다니며 협상하였다. 이후 농민 조합 운동은 1930년대 초 안계 적색 농민 조합으로 계승되었다.
의성군 안계면의 농민 운동[안계 적색 농민 조합]은 1920년대 대구에서 대구 청년 동맹과 신간회 대구 지회에서 활동했던 박명줄(朴明茁)이 의성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명줄이 중심이 되어 1931년부터 의성군의 안계면·단북면·비안면·귀산면·다인면 등 5개 면의 농민을 대상으로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관련 인물로는 박명줄을 비롯하여 임응우·이원영·박근주·금영석·박연순 등이 있다.
[의성 적색 독서회 관련 인물]
의성 적색 독서회(義城 赤色 讀書會)는 사회주의를 통해 독립을 모색한 비밀 결사 단체로 모스크바 공산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해 1931년 무렵 의성으로 들어온 오기수(吳麒洙)에 의해 주도되었다. 오기수는 지역의 김규복(金圭福)·오병수(吳炳洙) 등을 포섭하여 적색 스포츠단, 노동자 친목회, 농민 조합, 농민계, 테러를 위한 비밀 결사, 적색 독서회 등 합법·비합법의 단체를 결성하는 데 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와해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관련 인물로 오기수를 비롯하여 오병수·김규진·김진봉·박수창·김두칠·문상준·김진원·오찬주·권영도 등이 있다.
[학생 운동 관련 인물]
대구 사범 학교 다혁당 운동에 참여한 박효순·이무영·윤영석, 대구 고등 보통학교 학생 운동에 참여한 김영소·이규남·박태식, 대구 상업 학교 태극단 운동에 참여한 이원현, 계성 학교 운동에 참여한 허성도·김재범·이기명·윤유암, 안동 농림 학교 학생 운동에 참여한 신두수 등이 있다.
[기타 활동 인물]
3·1 운동 에 영향을 입어 의성 지역 유림 세력들은 독립 청원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국외 무장 투쟁 세력과 연계한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열을 올렸다. 파리 장서 사건(巴里 長書 事件) 때 서명을 한 단밀면 생송동의 권상두(權相斗)를 비롯하여, 신간회에서 활동한 김광진(金光鎭)·이일세(李一世), 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한 김경성(金慶聲)·오일수·오진문(吳進文)·박재화 등이 있다. 해외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만주의 이칠봉·오기수(吳麒洙)[오인수(吳麟洙)]·마춘성(馬春成)·권동섭·오재수·박시목(朴時穆)·박석홍(朴錫洪) 등과 일본에서 활동한 신산축, 산남진(山南陣)에서 활약한 유중호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장성표·이종구·권오옥·김만식·노재섭·오서희·이용득·배선두·박효인 등은 사선을 넘어 광복군으로 귀순하여 활동하였다. 이밖에 유상묵(柳尙默)을 비롯하여 김반석·이현설·장래주·김기태·손문현·황적은·황경덕·이종률·오성무·김수영·이해운·윤정도·김홍락·신수조·정정달·권중윤 등도 피나는 항쟁을 펼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