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81 |
---|---|
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5년 해방 이후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의성의 지형과 지리적 특징]
경상북도 의성군은 태백산에서 남으로 뻗은 태백산맥과 서남으로 뻗은 소백산맥이 소쿠리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지형에 위치한다. 태백산맥의 영천 보현산에서 온 줄기가 춘산면에서 두 갈래로 갈려져, 한 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춘산면의 산두봉, 옥산면의 황학산, 단촌면의 갈라산을 만들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굽어 신평면의 봉암산, 다인면의 독점산과 비봉산을 지나 다시 남으로 굽어 예천군 풍양면에서 건지봉을 이루고 상주시의 중동면까지 내려와서 일월산맥이 끝이 난다. 의성의 동쪽 지역은 산간 지대가 많으며, 서쪽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넓은 평야 지대를 이룬다.
[현대 의성의 행정 구역 변화]
의성군은 경상북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의성면 등 모두 17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940년에는 의성면의 후죽동 등 13개 동이 의성읍으로 승격되어 종래 17개 면이 1읍 16개 면으로 변화하였다. 2012년 현재는 1읍 17개 면 400리 1,545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 의성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의성군에서는 8·15 광복 직후 치안을 유지하고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건국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건국 준비 위원회는 이후 인민 위원회로 전환되어,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의성군에서는 미 군정 실시 이후에도 좌우익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였으나, 1946년 대구에서 좌익이 주도가 되어 미 군정의 통치에 반발하여 일으킨 10·1 항쟁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 이 사건으로 의성군에서도 일반인 1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관청 건물 8곳과 일반 건물 4곳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1948년 한국 문제가 UN으로 이관되면서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정우일(丁又一)[의성군 갑구]과 권병로(權炳魯)[의성군 을구] 등이 제헌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였고, 의성군은 8월 5일 북한 인민군에 점령되었다. 국군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하도록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의성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며 의성군은 국군에 의해 회복되었다.
의성군은 1959년에 태풍 사라호의 피해를 입었다. 사라호는 9월 17일 낮에 경상남도 통영에 상륙하여 포항을 지나 동해로 빠져 나갔는데, 이 때 남해안과 영남 지방에서 결실기에 접어든 농산물을 비롯한 가옥과 농지에 막대한 입혔다. 의성군에서도 전답이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인명 피해는 크게 입지 않았다. 1960년 4월에는 이승만의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의성군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1980년대 의성군의 농민 운동]
의성군의 주요 산업은 농·축산업이었고, 1980년대 의성군에서는 농민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1980년대 정부는 ‘증산 정책의 지속과 물가 안정 명목의 수입 개방 정책, 그리고 소득 증대를 위한 복합 영농과 농촌 공업화 정책’을 펼쳐 농민들의 경제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1984년 의성군 다인면에서 잇따라 농민 대회를 개최하여 쌀 수매가 동결 등의 반 농민적인 농업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안동 가톨릭 농민회가 대구 교구 연합회와 함께 의성군의 다인 성당에서 ‘추수 감사제 및 경북 농민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물가 안정을 이유로 비축 품목의 수입을 확대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쇠고기의 수입은 기존의 복합 영농 정책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축산 농가에 고통을 주었다. 이에 1985년 7월 21일 의성군 다인면에서 ‘소 값 파동과 소몰이 시위’가 벌어졌다. 이렇게 촉발된 시위는 1986년 9월 1일 의성군 안계면을 비롯하여 안동시 풍천면과 영양군 등지의 축산 농민 150여 명이 벌인 ‘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 실천 대회’로 이어졌다. 의성군의 농민 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에도 계속되어 같은 해 9월 말 ‘쌀 생산비 보장 및 농협 민주화 쟁취 의성 대회’가 열렸다. 1988년 9월에도 의성군 농민 약 800여 명이 참석한 의성 농민 대회가 열렸다. 이처럼 1980년대 의성군은 경상북도 농민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의성군의 특산물]
의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목화를 심고 가꾸었던 곳이며, 의성의 넓은 평야 지대는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유명한 쌀 생산 지역이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주로 산지로 구성되어 있는 의성의 동쪽 지역에서 특용 작물의 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특용 작물은 마늘이었다. 의성 마늘은 전국에서도 그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마늘 값이 한창 뛰었을 때에는, “의성 사람 마늘 한 리어카 싣고 나가서 돈 한 리어카 싣고 온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 고추와 약재를 재배하여 ‘골짜기마다 풍년이 드는’ 동네가 생겼다. 약재 가운데는 해열제와 강장제 같은 약재로 널리 쓰이는 산수유가 큰 몫을 차지한다. 또한 사과, 포도, 자두 등의 과실 재배도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특산물과 관련하여 의성에서는 관련 축제가 연중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매년 3월 무렵 산수유가 열릴 때 열리는 의성 산수유 꽃 축제를 시작으로, 세계 의성 마늘 축제, 자두 축제 등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