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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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전통 시대와 개항기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忠)을 실천한 신하.
[개설]
전통 시대에 신하에게 가장 강조하고 요구하였던 덕목은 충(忠)이다. 이 덕목은 자신보다 높은 존재인 임금을 위해 행동하고, 개인보다 국가를 위해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충신은 왕조의 교체기나 국난의 시기에 많이 나타난다. 왕조의 운세가 다하여 기울어져도 새로운 왕조에 협력하지 않는 것이 충신의 지조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충신의 몸가짐이다. 충은 전통 시대의 가치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의성 지역의 충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는 『교남지(嶠南誌)』와 『영남읍지(嶺南邑誌)』가 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충신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미약해진 왕권을 옹호하고, 지지하며, 지조를 지킨 신하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은 신하이다.
[고려 시대 의성의 충신]
의성 지역의 충신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고려의 건국에 기여한 신하와 말기에 지조를 지킨 신하로 구분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충신이 김홍술(金洪術)[?~929]과 홍유(洪儒)[?~936]이다. 김홍술은 진보성(眞寶城)의 장군으로 고려에 귀부하여 의성부 성주(義城府城主)로 임명되었으며, 후백제의 견훤이 공격해 왔을 때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태조 왕건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자신의 두 팔을 잃은 것과 같다고 슬퍼했다고 전한다. 홍유는 마군 장군(馬軍將軍)으로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훗날 후삼국을 통일하는 일리천(一利川)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태사 개국 충렬공(太師 開國 忠烈公)으로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고려의 충신으로서 지조를 지킨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김성단(金成丹), 구홍(具鴻), 오국화(吳國華), 장보지(張輔之), 이연계(李連桂), 장사검(張思儉) 등이 있다. 이들은 고려가 망하자 은둔하여 지조를 지킨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로는 이연계를 들 수 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사촌 아우로 고려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태조에게 그 부당함을 간하다가 양양(襄陽)으로 유배되었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후손들에게 본관을 대흥(大興)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훗날 태종이 사면과 함께 전주 이씨로 환원하라는 전교가 있었음에도 후손들이 따르지 않아 대흥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조선 시대 의성의 충신]
조선이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이는 인간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길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념에 의거했을 때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은 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단종을 복위시키려 시도한 신하는 물론이고, 세조 시대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신하들 역시 충신으로 기록된다.
조선 초기 의성 지역의 충신으로 기록된 신하는 단종 복위 사건과 연관된 권식(權軾)과 김득하(金得河)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지조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일생을 마쳤다.
이들 외에 의성에서 충신으로 기록된 이들은 대부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다.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충신으로 기록된 사람은 김치중(金致中)[?~1592], 오득심(吳得心), 정몽열(丁夢說), 권희순(權希舜)[1551~?], 박무선(朴茂先), 김희(金喜), 박사숙(朴嗣叔), 박충인(朴忠仁), 정호(鄭瑚), 변세림(卞世琳), 김태(金兌)[1561~?], 변득인(卞得仁), 손복(孫福) 등이다. 여기에서도 주목할 사람은 김치중이다. 그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네 아우 및 숙부와 함께 모집한 의병을 이끌고 적과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게 되자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와 종복들도 함께 자결하여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를 기리는 정려비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때 관원들이 묻은 것을 1956년 새롭게 중수한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의성에서는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신적도(申適道)[1574~1663], 구혜(具譓)[1606~1666], 김엽(金燁)[1586~1637], 김황(金煌), 김찬(金燦), 이사운(李士雲), 김득민(金得民), 박효순(朴孝純), 김호영(金鎬榮), 김옥(金鈺)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주목할 사람은 김엽과 그의 두 아우인 김황·김찬이다. 김엽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신적도를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문경의 조령(鳥嶺)에 이르렀을 때 조정이 청(淸)과 화친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연로한 부친을 모시기 위해 막내 동생 김환만 남겨 놓고 나머지 두 동생을 데리고 전쟁에 나섰다. 전쟁 초기 경기도 광주 쌍령(雙嶺)에서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적과 만나게 되었으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맞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전투에서 삼형제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 사실을 그의 마졸(馬卒) 막생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무랑 사도시 주부(宣務郞司導寺主簿)를 추증하고, 그의 두 동생에게는 주부(主簿)를 추증하였다.
[의의와 평가]
의성 지역의 충신으로 기록된 사람은 임금을 위해 지조를 지키거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다. 충이라는 덕목은 인간 관계에 있어 수직적 상하 관계를 공고히 하고, 개인보다는 전체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전제 군주 시대의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과 개성을 존중하는 현대의 가치관과 대립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물론이고, 공동체의 해체라는 위기에 처한 현재에 시사하는 바 또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