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93
한자 金光粹
이칭/별칭 국화(國華),송은(松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68년연표보기 - 김광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1년 - 김광수 진사시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63년연표보기 - 김광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85년 - 김광수 장대 서원에 배향
출생지 김광수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영귀정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지도보기
묘소|단소 김광수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명고 1리 대산곡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장대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산34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안동(安東[舊])
대표 관직|경력 진사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舊]安東).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처사(松隱處士)·사휴자(四休子). 김자첨(金子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효온(金孝溫)이고, 아버지는 지례 현감 김극해(金克諧)이며, 어머니는 연안 강씨(延安 姜氏) 사용(司勇) 강재(姜載)의 딸이고, 부인은 영양 남씨(英陽 南氏) 남치(南畤)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광수(金光粹)[1468~1563]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성리학을 연구해서 조예가 깊었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된 후, 태학(太學)에 들어 공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고향인 의성의 북촌(北村)[사촌]으로 내려와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부터 세상일을 사절하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청빈하게 지냈다. 손수 향나무를 심고 만년송(萬年松)이라 이름 붙이고 항상 책을 들고 종일 그 밑에 있었기에, 이로써 스스로를 ‘송은거사(松隱居士)’라 하였다.

[학문과 저술]

효우와 학문, 덕망이 높고,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당시의 선비들이 추앙하였다. 「만년송정운(萬年松亭韻)」과 「독화신국전희음(讀花神國傳戯吟)」은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세에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또한 「경심잠십장(警心箴十章)」은 후손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동생 김광복(金光復)과 함께 『연방고(聯芳稿)』를 지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3권 1책의 『송은 선생 문집(松隱 先生 文集)』은 1740년에 장대 서원(藏待 書院)에서 간행하였고, 1926년 중간하였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명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85년(숙종 11) 사림이 장대 서원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가계]첫 줄에 '사유자'를 사휴자(四休子)'로 고쳐 주시고,[활동사항] 다섯째줄에 '집 앞에 큰 소나무[만년송(萬年松)]'은 큰 소나무가 아니고, 손수 심은 향나무에 만년송이란 이름을 지어 붙이고, 만년송정운(萬年松亭韻) 등 한시 2수를 지었으며, 의성현령을 지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만년송의 안부를 물을 정도 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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