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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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蟹踰嶺戰鬪 |
이칭/별칭 | 게너미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도남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4월 13일 - 임진왜란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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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2년 5월 - 해유령 전투 승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2년 5월 18일 - 해유령 전투의 영웅인 부원수 신각 참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7년 - 해유령 전첩비 건립 |
발생|시작 장소 | 해유령 전투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신각|이양원|이혼 |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을 상대로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16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명나라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 정권 수립 등 주변 정세의 변화 속에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조선은 16세기 초에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일본과의 교역을 단절하여 임진왜란 직전에는 양국 간의 교섭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 무렵 일본은 오랜 내란을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아직 세력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대외 교역상의 문제점이 있어 이를 군사적인 대외 침략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약 20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본은 동래성을 함락한 후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당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그런데 1592년 5월 중순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계속 북쪽으로 진격하는 가운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 신각(申恪)은 한강의 방어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적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한 김명원이 변복을 하고 임진강으로 도망가자 부원수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마침 함경병사 이혼(李渾)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전열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에 신각은 이양원, 이혼, 그리고 인천부사 이시언과 합동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북상중인 적을 양주의 해유령에서 맞았다.
신각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은 당시 한성에 들어와 있던 적의 일부가 한성 근교 및 양주 일대에서 약탈 행위를 일삼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해유령 부근에 잠복하고 있다가 그들의 퇴로를 끊고 공격하였다. 즉 5월 중순 일본군은 약탈한 식량과 우마 등을 싣고 해유령을 넘어 한성으로 향하였다. 이때 왜적은 저녁이기도 하였지만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자, 취한 자, 말고삐를 길게 늘어뜨리고 조는 자 등 전반적으로 전투태세가 해이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군은 지형과 지물을 이용한 기습 작전으로 해유령 부근에서 적을 완전히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뜻밖의 기습을 받은 적은 혼비백산하여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하였다. 조선군은 순식간에 적 70여 명을 쓰러뜨리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신각과 이혼이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결과]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신각과 이양원은 곧 군사를 이끌고 임진강 쪽으로 가서 대탄[연천 부근]을 지키기로 하고, 이혼은 철령 방면으로 가서 적이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곳에서는 신각의 억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한강선을 방위하다가 패주한 김명원은 신각이 주장인 자신의 명을 어기고 도망친 것으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5월 18일 선전관을 파견하여 대탄에 와 있던 신각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처형 명령을 내린 뒤 해유령 전투의 승전 소식을 접한 선조는 곧 선전관을 파견하여 처형 집행을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신각은 효수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해유령 전투는 조선군이 일본군의 부산 침입 이후에 치룬 접전 중 추풍역 전투 다음으로 큰 전과였다. 이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조선군의 사기를 올리고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다. 해유령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77년 백석면 연곡리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0.6m의 해유령 전첩비를 세웠다. 해유령 전첩비 밑에는 해유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신각과 이양원, 이혼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충현사(忠顯祠)를 세우고 매년 5월 26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