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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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駐韓 美軍 裝甲車- 女中生 壓死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정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2002년 6월 13일 -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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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2002년 11월 23일 - 무죄 판결 |
전개 시기/일시 | 2002년 11월 18일~23일 - 군사 재판 실시 |
전개 시기/일시 | 2002년 11월 26일 - 추모 대회 및 촛불 집회 개최 |
발생|시작 장소 | 지방도 56호선 갓길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
성격 | 미군 연루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신효순|심미선|미군장갑차여중생사망사건범국민대책위원회 |
[정의]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두 명이 압사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6·25 전쟁이 종료되고 남북한 간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주한 미군은 1958년 2개 사단만 남기고 점차 철수를 시작하였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한·미 동맹이 강화되었고, 미군은 휴전 상태인 정전 체제를 관리하기 위해 한국에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 배치된 주한 미군은 미8군으로, 산하 부대로 장갑차 사건과 관련 있는 미 육군 2사단 등이 있다. 주한 미군은 인성 교육이나 한미간 문화 차이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다 주둔군으로서 한국인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부족해 사고의 위험이 항상 잠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경과]
사건은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편도 1차선인 지방도 56호선을 걷고 있던 조양중학교 2학년 신효순과 심미선 두 여학생을 미군의 장갑차가 치고 압사시키면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2사단을 비롯한 주한 미군, 미국 정부는 훈련 중 발생한 사고로 치부하며 미온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들은 유족들에 대한 사고 설명에서 우발적 사고임을 강조하였고,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누구도 책임질 만한 과실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한국 검찰 역시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유족들과 한국 시민 사회에서는 진상 조사와 재판 회부 등을 일차적으로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 미군 당국은 유족과 한국 시민 사회의 관련자 재판 회부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미군은 “동 사고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이제껏 미국이 제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미군 당국은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 미2사단장 등에 대한 재판권을 한국 법무부 등으로 이속하지 않고, 단지 공무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재판권이 미국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결국 재판은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군사 법정에서 군사 재판으로 열리게 되었다.
[결과]
양주 시민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서는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효순이 미선이 추모공원을 조성하였으며, 2002년 9월 21일 미 2사단에서는 이곳에 신효순과 심미선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2년 11월 18~23일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미 군사 법정 배심원단은 당시 장갑차를 조종하던 페르난도 니노와 마크 워커 두 병사에 대해 공무를 행하던 중 발생한 과실 사고라 하여 무죄[not guilty] 평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한국 시민 사회의 반발은 폭발하였다. 각계각층의 시민 사회에서는 미군장갑차여중생사망사건범국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11월 26일 압사 여중생 추모 대회를 겸한 촛불 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때 반미 감정이 더욱 증폭되었고 반미 운동과 함께 ‘주한 미군 철수’라는 슬로건이 나오기도 하였다.
언론에서도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을 전면 재개정하고 재판 관할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할 것 등을 논하는 요구들이 나왔다. 이에 따라 부시 대통령의 간접 사과와 유감 표시 등이 행해졌으며 한미간 SOFA 개선 방침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조문 해석에 대한 논의에 그쳤다.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진실 규명은 아직도 미해결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해 한미 양국 간의 지위 문제, 인권 문제, 방위 문제 등에 대한 재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