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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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丹陽 禹氏 梧山里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 |
시대 | 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서동일 |
개설 시기/일시 | 1700년대 - 단양 우씨 오산리 집성촌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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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단양 우씨 오산리 집성촌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 |
성격 | 집성촌 |
가구수 | 10가구 |
인구(남,여) | 40명 |
[정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에 있는 단양 우씨 집성촌.
[개설]
단양 우씨의 시조는 우현(禹玄)으로 고려 시대에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다. 9세손인 우현보(禹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진 후 그 후손이 단양을 본관으로 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6세손인 우중대(禹中大)가 고려 공민왕 때 단양을 본관으로 삼았고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고 하므로, 실제로는 우중대 이후 단양 우씨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양 우씨는 주로 경상남도 창녕,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봉화·영풍, 황해도 연백·신천에 대대로 살고 있다. 2000년 현재 인구는 5만 789가구에 16만 2479명이다.
[형성 및 변천]
단양 우씨 오산리(梧山里) 집성촌의 입향조는 우중대의 20세손인 우경집(禹敬緝)이다. 우경집의 묘는 현재 북한 지역[황해도 장단군]에 있고, 그의 아들 우정혁(禹鼎赫)의 묘가 현 양주시 광적면 그루고개로 68번길[가납리 산57-2번지]의 단양 우씨 선영에 있다. 선영에는 약 30기의 묘가 있다. 6·25 전쟁 이전에는 황해도 장단군에 있는 집안사람들과 왕래가 빈번했으나 전쟁 이후 왕래와 소식이 끊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편 단양 우씨는 양주시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정안공파는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 이안군파는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대제학파는 양주시 만송동, 정평공파는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 및 광적면에 주로 거주한다. 양주시 단양 우씨의 전체 인구는 1985년 380명에서 2000년 487명으로 늘었다.
[현황]
단양 우씨 오산리 집성촌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조사한 양주 지역 54개 집성촌에 포함되지 않았다. 집성촌의 규모는 1950년 6·25 전쟁 직전에는 30가구였다가 1953년 23가구, 1977년 41가구[백석읍 전체], 1992년 45가구였고, 2011년 현재는 약 10가구이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전통 사회의 붕괴 및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급격한 이농 현상 때문에 집성촌은 점차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주요 행사는 매년 음력 10월 10일 지내는 시제이다. 원래 음력 7월 15일에 벌초를 했지만, 최근에 후손의 사정을 고려해 8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