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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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昌兪 |
이칭/별칭 | 문중(文仲),성수(聖受),정창조(鄭昌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713년 - 정창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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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29년 - 식년시 진사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45년 - 선릉 참봉 |
활동 시기/일시 | 1750년 - 고령 현감 |
활동 시기/일시 | 1753년 - 문화 현령 |
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청도 군수 |
몰년 시기/일시 | 1758년 - 정창유 사망 |
출생지 | 한양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온양 정씨 묘역 - 경기도 양주시 고덕로 108-60 산90 시장골[산북동 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온양 |
대표 관직 | 청도 군수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온양. 본명은 정창조(鄭昌祚), 호는 문중(文仲)·성수(聖受). 할아버지는 정수곤(鄭壽崑)이고, 아버지는 단양 군수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정광겸(鄭光謙)이다.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안동진관 병마 동첨절제사(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조태휘(趙泰彙)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의 딸이다. 형은 진사 정창언(鄭昌言), 동생은 좌찬성 정창사(鄭昌師)이다. 아들은 이조판서 정원시(鄭元始), 병조판서 정민시(鄭民始)다. 정민시는 동생 정창사에게 입양 보냈다. 손자는 정치우(鄭致愚)이다.
[활동 사항]
정창유(鄭昌兪)[1713~1758]는 1745년(영조 21) 음관(蔭官)으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이 되었고, 1750년(영조 26) 고령 현감, 1753년(영조 29) 문화 현령, 1756년(영조 32) 청도 군수를 지냈다. 청도 군수 재임 시 운문사에 불이 났는데, 부서진 불상 내부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명필인 김생(金生)의 글씨가 나왔다. 종이에 ‘나무수일절의법운불(南無隨一切意法雲佛)’ 등 여섯 명의 부처의 이름이 세로로 씌어 있고, 오른쪽 귀퉁이에는 후대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김생육행(金生六行)[김생이 쓴 6줄]’이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다. 정창유가 화재를 수습하면서 챙겨 나와 온양 정씨 가문에서 대대로 보관해 오고 있다.
[묘소]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온양 정씨 묘역의 왼편 능선에 있다. 쌍분 삼위 장묘로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석양(石羊), 장명등 등의 석물을 갖췄다. 1790년(정조 14)에 세진 묘표는 옥개형 4면 비로, 아들 정민시가 비문을 짓고 손자 정치우가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