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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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辰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 김진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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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백남식·이용화 등과 광적면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만세배미에 모여 시위를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시위 중 헌병에게 저격당함 |
출생지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
거주|이주지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
활동지 | 만세배미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진성(金辰成)[1868~1919]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김진성은 백남식(白南式)·이용화(李龍和) 등과 함께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되자 광적면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거사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면서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리고 시위 계획을 알리기 위해 마을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일장기를 변조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28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시위는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김진성은 이용화·백남식 등 동지들과 함께 진화 작업을 마친 후 4㎞ 거리인 가납리로 가서 만세 시위[가래비 3·1 만세 운동]를 전개하였다. 효촌리 주민들이 도착했을 때 가납리 면민들은 만세 시위를 벌인 후 해산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들은 효촌리 주민들을 보고 다시 모여들어 시위대는 약 950명에 이르게 되었다.
만세배미[현재의 광적면사무소 앞에 있는 논]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던 시위대에게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 4명과 보조원이 도착하여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자 이용화가 헌병들을 꾸짖었고, 이에 시위대는 기세가 올라가 점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시위대 중 누군가가 돌팔매질을 하자 헌병들이 발포하였다. 그 결과 김진성 등 세 사람이 사망하였고, 4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