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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224
한자 朴峻
이칭/별칭 자첨(子瞻),귀전(歸田)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9년 12월 24일연표보기 - 박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 박준 헌릉참봉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박준 귀후서별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1년연표보기 - 박준 동부주부, 사헌부감찰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박준 신령현감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 박준 비안현감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25년연표보기 - 박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53년 10월연표보기 - 박준 팔각비 건립
묘소|단소 박준 묘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지도보기
성격 문신|효자
성별
본관 비안(比安)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가계]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자첨(子瞻), 호는 귀전(歸田). 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박계인(朴繼仁)이고, 아버지는 삭주부사(朔州府使)를 역임한 박희성(朴希聖)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청계군(淸溪君) 이채(李彩)의 딸이다.

[활동사항]

박준(朴峻)[1559~1625]은 임진왜란 때 학질을 앓는 계모 민씨를 업고 피난하느라 처자를 돌보지 못하여 부인 박씨를 잃었다. 1604년(선조 37) 풍병을 앓는 아버지를 위하여 당시 어의인 허준(許浚)을 모시려 하였으나 얼굴도 볼 수 없었는데, 매일 새벽 집으로 찾아가 애원하자 그 효성에 감복한 허준이 약을 지어 주었다. 그 후 다시 병이 나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1604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06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어느 날인가 산불이 나서 묘까지 번지려 하자 몸을 던져 불을 끄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니 갑자기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불이 번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박준의 효행은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렸으며, 유림들의 추천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610년에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가 되었다. 1611년에는 청백리의 후손이라 하여 동부 주부(東部主簿)와 사헌부 감찰을 거쳤다. 1613년 신령 현감[신령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신령면]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623년 비안 현감에 제수되었다. 재임 중인 1625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양주시 남면 신암리 감악산 백적봉에 효행을 적은 팔각비(八角碑)와 묘가 남아 있다. 1653년(효종 4) 10월에 세워진 팔각비는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이 글을 짓고, 이조정랑 이정영(李正英)이 쓰고, 이조참판 여이징(呂爾徵)이 전(篆)하였다. 규모는 옥개석 각 면 너비 50㎝, 높이 61㎝이고, 비신 각 면 너비 25.5㎝, 높이 177㎝, 비석받침 각 면 너비 58㎝, 높이 54㎝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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