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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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권만용 |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 출신이거나 양주에 연고를 두고 국가나 왕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
[개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로서 충효 사상을 강조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충신과 효자, 열녀를 배출하였다. 양주 또한 이 지역 출신자나 연고를 둔 인물 중에서 충신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양주에는 충신과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정문(旌門)이 많이 남아 있다. 양주의 충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물 및 내용]
1. 권율
권율(權慄)[1537~159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주에서 군사 1만여 명을 지휘하여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1593년(선조 26)에도 3만의 왜군을 물리치면서 행주대첩을 이끌었다. 1599년(선조 32) 62세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부제(賻祭)를 후하게 내리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으며, 선무공신 1등 영가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번지에 묘소가 있다.
2. 권절
권절(權節)[1422~1494]은 평소 수양대군과 교유가 있어 계유정난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귀머거리로 가장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세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정신병에 걸렸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단종에 대한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를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남효온(南孝溫)을 대신하여 말하기도 한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절의를 추앙받게 되었고, 1703년(숙종 29) 10월에 충신권절지정문(忠臣權節之旌門)이 내려졌다. 정문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450번지에 있다. 1791년(정조 15) 창절사에 제향되었다.
3. 백인걸
백인걸(白仁傑)[1497~157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금강산에서 은거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579년(선조 12) 이이(李珥)와 함께 붕당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며 조화를 이룰 것을 주장했고, 또한 군비 강화를 강조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다. 파주 파산서원, 남평 봉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충숙(忠肅)이었으나 후에 문경(文敬)으로 바뀌었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26번지에 묘소가 있다.
4. 여영원
여영원(呂榮元)[1595~1627]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後金)이 쳐들어오자 압록강 변의 요충인 벽동(碧潼) 수비의 책임을 맡고 성마루에 올라 고군분투하다가 정세가 불리해지자 “적을 다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정문이 내려졌다.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산881번지에 있던 정문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그 자리는 군사 기지로 변하였다.
5. 홍명형
홍명형(洪命亨)[1581~1636]은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호종하여 공주로 피난하였다. 1636년 승문원부제조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적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김상용(金尙容)이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할 때 그 속에 뛰어들어 함께 자결하였다. 그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도 같이 순절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화도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에 충신 정문이 내려졌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허물어지고 판액만 후손들에게 전해져 왔는데, 최근에 묘소 앞에 정문을 세우고 판액을 걸었다.
6. 기타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368번지 창정각(彰旌閣)에는 1604년(선조 37) 12월 정려를 받은 한겸(韓謙)과 1669년(현종 10) 8월에 판액을 받은 한순(韓栒)의 정려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