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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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世玟 |
영어음역 | Bak Semin |
이칭/별칭 | 박세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879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재순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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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879 |
성별 | 남 |
생년 | 1893년 |
몰년 | 1920년 |
본관 | 밀양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박세민(朴世玟)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하북면사무소에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3일 하북면사무소 뒤편 신평 장터에서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 공약서, 경고문 등을 배부하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였다. 당시 박세민은 만세 운동 주동자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또한 그들이 피검되지 않도록 신속한 조치를 취하여 주모자들이 무사히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즉시 사직하고 일본 경찰의 체포 망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하였으나 신평 만세 운동에 가담한 사실을 알아낸 일본 경찰의 추적으로 일본에서 검거되었다. 일본 경찰은 박세민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빈사 상태가 되자 본적지로 압송하지 않고 일단 석방하였다. 그러나 박세민은 그 고문으로 인해 1개월 만에 일본 신호시 장정촌 3번지에서 사망하였다. 1920년 9월 고향인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로 유골이 돌아오자 양산청년회에서는 청년회 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가촌리 뒷산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