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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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謙受 |
영어음역 | Yi Gyeomsu |
이칭/별칭 | 자허,잠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학성(鶴城). 세조의 원종공신인 수사 이종실의 5세손이다.
[활동사항]
이겸수는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전공이 있었다. 1594년(선조 27)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대장으로 하는 왜적이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에게 화의를 청하였다. 그 해 3월 5일 조정에서 그 진위를 탐정하고자 장희춘(莊希春)과 이겸수 등을 일본의 적진으로 파병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부터 사명대사와 함께 11차례에 걸쳐 왜의 적진에 파견되어 양국간 강화회담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수뇌부의 한반도 삼도 분할 구상을 간파하고, 왜군 내부의 이간책을 시도해 협상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명나라 장수 유정이 이겸수를 ‘충성된 붉은 피는 양국을 위해 섬기는 바로구나.’라고 일컬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공으로 정주판관(定州判官)을 제수하여 부임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병이 들어 시(詩)를 읊으며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수명은 내 몸의 임박함을 슬퍼하지 않으나, 나의 한평생은 오로지 성조(聖朝)의 관후한 은혜를 입었도다.”
[상훈과 추모]
이겸수는 임진왜란의 공훈으로 원종훈삼등공신(原從勳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남강사(南岡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