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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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권혜인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10월 - 광릉 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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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광릉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120-4 |
성격 | 무덤 |
관련 인물 | 최원도|이당|이집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있는 광주 이씨의 시조 묘.
[개설]
광릉은 600여 년 전 고려 말 광주 이씨 이집(李集)과 영천 최씨 최원도(崔元道) 두 사람의 신의와 우정이 담겨 있는 장소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고려 말 최원도는 신돈(辛旽)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고향 영천으로 내려와 살았다. 당시 우의가 돈독했던 친구 이집 또한 정사에서 떠나 둔촌동 집에 머무르면서 모의를 꾀하다 발각되어 몰래 늙은 부친 이당(李唐)을 모시고 친구 최원도 집을 찾아 몇 달 만에 도착하였다.
마침 최원도는 향리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음유에 젖어 있을 때 이 집의 사랑채에서 부친과 쉬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최원도는 무척 성을 내며 찾아와 부자를 쫓아내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다. 이집은 최원도의 뜻을 알아채고 마을 밖으로 몸을 숨겨 밤까지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최원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부자를 데리고 와 다락방에 숨겼다.
오랫동안 집안 사람들도 모르게 지내오다 어느 날 부엌일을 맡은 여종이 주인의 식사량이 증가한 데 이상히 여겨 문틈으로 엿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종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이집의 아버지가 다락방에서 돌아가셨는데 최원도는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서 정성껏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것이 광주 이씨 시조 이당의 묘이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광주 이씨와 영천 최씨 두 가문의 후손들은 선대의 각별한 우의를 항상 생각하면서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상대방의 조상 묘에 참배하는 풍습이 전해져 오고 있다.
왕의 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광릉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덤이 능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위치]
대창면 소재지에서 909번 지방도[금창로]를 따라 어방리를 지나면 왼쪽에 도유리 마을이 나온다. 마을길인 광릉1길을 따라 들어서면 광릉의 추원재와 관리사무소가 있고, 그 북쪽 뒷산에 두 기의 묘가 있다. 광주 이씨 시조인 이당의 묘가 앞에 있고, 그 뒤쪽에 최원도의 어머니 묘가 있다.
[형태]
광릉의 규모는 지름 14m, 높이 3m 정도이며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광릉의 묘 앞은 이단으로 단이 져 있으며, 제일 아랫단에 석등과 향등이 있다. 그 윗단에 문인석이 양 쪽에 1기씩 세워져 있다. 문인석의 크기는 높이 1.2m 정도이며 풍화작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묘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묘비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983년 10월에 세워진 것이다. 최원도의 어머니 묘 앞에는 무인석이 세워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의의와 평가]
광릉은 고려 말 어지러운 시기에 최원도와 그의 친구 이집에 대한 깊은 우의를 엿볼 수 있는 무덤이다. 그들의 신의와 우정은 오늘날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서로 추모하는 풍습이 남아 있어 각박한 현대인에게 모범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