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11 |
---|---|
한자 | 于尸郡 |
영어공식명칭 | Usigun |
이칭/별칭 | 유린군,예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제정 시기/일시 | 삼국 시대 - 우시군 설치 |
---|---|
개정 시기/일시 | 757년 - 우시군을 유린군으로 개칭 |
관할 지역 | 우시군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창수면|병곡면|축산면 |
[정의]
삼국 시대부터 757년까지 영덕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구역.
[개설]
우시군(于尸郡)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보인다. 5세기 후엽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삼국 통일 이후 경덕왕이 우시군을 유린군(有鄰郡)으로 개칭하였다. 영현으로는 아혜현(阿兮縣)이 있다.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을 중심으로 창수면·병곡면·축산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우시군은 고구려가 동해안 일대로 진출하여 영해면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행정구역이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35 지리지 명주조에는 "유린군은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인데,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고려시대]의 예주(禮州)이며, 영현은 하나이다. 해아현(海阿縣)은 본래 고구려의 아혜현인데, 경덕왕이 개칭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권37 지리지 하슬라주(何瑟羅州)조에는 고구려의 지명으로 우시군의 명칭만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지 예주조에도 "예주는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유린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용]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우시군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신라가 빼앗았고, 경덕왕 대에 유린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소속 현으로 기록된 아혜현 역시 고구려의 옛 지명으로, 경덕왕이 해아현으로 고쳤다.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신라에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던 시기[400~481], 혹은 장수왕이 신라를 공격하여 흥해 지역까지 진출하였던 시기[468~481]에 우시군을 설치하였으리라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현재 영해면에 소재한 괴시리 고분군에서 고구려의 문화적 요소가 일부 확인된다는 견해도 있는데,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배와 경영을 뒷받침할 단서는 아니라고 평가된다. 고구려가 영해면 지역에 군사적으로 진출하였더라도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지역 사회를 재편하지는 못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지배는 간접적인 수준의 영향력 행사에 머물렀을 것이다.
[변천]
우시군은 757년(경덕왕 16)에 유린군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가 건국된 후 940년(태조 23)에 예주라 하고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편제할 때 영동도(嶺東道)에 속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 삭방도(朔方道)에 편입하였다고도 한다. 1018년(현종 9)에 전국을 5도 양계(兩界)로 나눌 때 예주는 경상도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의의와 평가]
우시군은 동해안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하였던 고구려와 신라의 지방지배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