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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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山申氏 |
영어공식명칭 | Pyongsan-Shin Clan |
이칭/별칭 | 영해신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32년 - 신득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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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392년 - 신득청 사망 |
본관 | 평산 - 황해도 평산군 |
입향지 | 인량리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세거|집성지 | 세거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창수면 미곡리|영덕읍 구미리|영덕읍 화개리|지품면 속곡리|남정면 회리|강구면 소월리|강구면 금호리 |
성씨 시조 | 신숭겸(申崇謙) |
입향 시조 | 신득청(申得淸)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신득청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성씨.
[개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신숭겸(申崇謙)[?~927]을 시조로 하고 신득청(申得淸)[1332~1392]을 입향조로 하는 성씨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창수면 미곡리, 영덕읍 구미리, 영덕읍 화개리, 지품면 속곡리, 남정면 회리, 강구면 소월리, 강구면 금호리 등에 세거한다.
[연원]
평산신씨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한다. 신숭겸은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에게 포위되어 왕건이 위태롭게 되자 왕건을 대신하여 싸우다 순절하였다. 태조는 장절(壯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평산(平山)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평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입향 경위]
평산신씨의 영덕 입향조는 신숭겸의 15세손인 신득청이다. 신득청의 호는 이유헌(理猶軒)으로 고려 말 예빈시 판례(禮賓寺判禮)와 태복시 정(太僕寺正)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 왕에게 건의한 시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영해부(寧海府) 인량(仁良)으로 이거하였다가 고려가 망하자 대진 앞바다에 투신했다고 한다.
신득청의 아들 신자악(申自嶽)은 창수면 미곡리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세거하였고, 증손 신희(申禧)[?~?]는 영덕읍 구미리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영덕읍 화개리, 강구면 소월리, 남정면 회리, 지품면 속곡리 등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입향조 신득청과 계보를 달리하는 신숭겸의 21세손 둔와(遯窩) 신만걸(申萬傑)[?~?]이 임진왜란 때 용궁(龍宮)에서 영해부 입천동으로 이거하고, 신만걸의 손자 신준립이 만년에 인량에 정착하였다. 신만걸의 11세손 만괴헌(晩槐軒) 신재수(申在洙)[1798~1855]는 재력을 쌓아 향교와 서원의 운영을 지원하고 구휼사업에 많은 재산을 출연하여 명망가로 자리 잡았다.
신득청의 후손은 영해부 인량리에 정착하면서 영해신씨라 불렀는데, 1982년에 본관을 평산으로 환원하였다.
[현황]
신득청의 후손들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미곡리, 영덕읍 구미리·화개리, 지품면 속곡리, 남정면 회리, 강구면 소월리·금호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만걸의 후손들은 창수면 인량리에 세거하고 있다. 2015년 인구통계에는 영덕군 관내에 평산신씨 895명, 영해신씨 22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영덕읍 구미리에 있는 영덕수정재(盈德水晶齋)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수면 인량리의 신재수 종택인 영덕만괴헌(盈德晩槐軒)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