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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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Koryo Dynasty |
이칭/별칭 | 고려왕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영주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시대에는 여러 차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고을 명칭의 변경과 승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영주 지역에는 강주(剛州)·기주(基州)·흥주(興州)·순안현(順安縣)·영주(榮州)·흥녕현(興寧縣)·순흥부(順興府) 등 고을이 두어졌다. 문화적으로도 영주 지역은 고려시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1243~1306]이 배출되었으며, 부석사(浮石寺)는 여전히 우리나라 화엄종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삼국시대의 영주]
통일신라시대 영주 지역은 다른 영남의 고을과 달리 신라의 9주 중 북방 지역과 연결된 삭주(朔州)에 속하였다. 이에 일찍 영주 지역은 후고구려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궁예(弓裔)가 죽령 동북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혔던 906년(효공왕 10)경으로 추정된다. 궁예가 남쪽 지방을 순행할 때 부석사에 들려 신라왕의 화상을 칼로 쳤다는 설화는 영주 지역이 후고구려의 수중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영주 지역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영주 지역 출신 호족이었던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강공훤(康公萱)의 활약이 주목된다. 927년(태조 10) 견훤(甄萱)이 신라를 습격하자, 신라 경애왕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시중(侍中)이었던 강공훤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이어 929년에는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후백제군과의 고창전투[지금의 안동 일대에서 치른 전투]에 왕건을 따라 참전하였다. 또 936년(태조 19)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어, 기병 300명과 군사 1만 4700명을 거느리고 출정해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 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행정구역의 변천]
고려시대 영주의 행정구역은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영천(榮川)·풍기(豊基)·순흥(順興)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영천
영천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내기군(柰己郡)이었지만 신라 파사왕대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경덕왕대 내령군(柰靈郡)으로 고쳐졌다. 고려 초기 내령군은 강주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이 무렵 고려 정부의 도단련사 파견은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당나라의 절도사제도를 수용한 것이다. 이에 12목의 거점지역에는 절도사, 그보다 규모가 작은 지역은 도단련사·단련사·자사·방어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절도사 체제에서 도단련사가 파견된 고을은 단 일곱 곳에 불과하였다. 이 사실은 영주 지역이 10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군사적으로 중요시되던 지역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도단련사는 고려의 실정에 맞지 않아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강주는 길주(吉州)[안동부]의 속현이 되는데, 이것은 주·속현체제로 지방제도가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12세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정치·사회적 혼란과 대규모 농민 유망에 따라, 고려 정부는 그동안 지방관이 없던 속군·속현에 현령과 감무 등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143년(인종 21) 강주는 순안현으로 개칭되고, 현령이 파견되었다. 1259년(고종 46)에는 위사공신 김준(金俊)의 고향이라 하여 영주로 승격시킨 뒤, 지영주사(知榮州事)를 파견하였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크게 상층구조인 주(州)·부(府)·군(郡)·현(縣) 등 군현제 영역과 하부구조인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 등 부곡제 영역으로 구분된다. 현재 확인되는 영주의 부곡으로는 벌지부곡(伐只部曲)·마구부곡(馬駒部曲)·용산부곡(龍山部曲)·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성을랑부곡(省乙良部曲)·오등부곡(烏等部曲)·유수부곡(楡水部曲)·답곡부곡(沓谷部曲)·니곡부곡(泥谷部曲)·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이 있다.
2. 풍기
풍기 지역의 신라 때 이름은 기목진(基木鎭)인데, 고려 초기에 기주로 개칭되었다. 기주는 1018년 주·속현체제로 재편될 때 길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비로소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뒤에 다시 속현이 되어 안동부에 내속되었고,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감무를 두고 독립하였다. 은풍현(殷豐縣)을 속현으로 삼게 되었다. 은풍현은 본래 신라의 은정현(殷正縣)으로 예천군의 속현이었는데, 고려 초기에 은풍현으로 개칭되었다. 이어 1018년 길주에 속했다가, 1390년 기주로 이속되었다.
3. 순흥
순흥 지역은 신라 경덕왕 대에 급산군(岌山郡)으로 고려 초기 흥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에는 길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순안현의 속현으로 옮겨졌다가, 1171년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순흥 지역은 특이하게도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충숙왕·충목왕 대 왕의 태(胎)가 안치되면서 읍격이 크게 성장하게 된다. 먼저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왕의 태를 안치한 고을이라고 하여, 흥녕현으로 고쳐지고 감무보다 높은 영(令)이 파견되었다.
1313년에는 충숙왕이 즉위하자 역시 왕의 태를 안치한 곳이라 하여 흥주로 고을 이름을 바꾸고, 지흥주사(知興州事)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1348년(충목왕 4)에는 충목왕의 태를 안치했다고 하여, 순흥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고려시대 순흥부의 부곡제 지역으로는 감곡부곡(甘谷部曲)·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임곡소(林谷所)가 확인된다.
[사상과 문화]
1. 안향과 성리학
고려시대 영주 지역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인사는 단연 안향이다. 안향은 고려 후기 순흥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한 후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안향은 당대 고려를 대표하던 학자로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그곳에서 새롭게 유행하던 성리학 학풍을 목도하고,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 왔다. 이후에는 사람을 원나라에 보내어 성리학 관련 서적과 공자 및 70제자들의 화상, 문묘에 사용할 제기·악기 등을 구해오게 했다. 나아가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에게 차등 있게 은과 포를 내게 한 후,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인재 양성에 활용했으며,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국자감 운영을 보조하였다. 이렇듯 안향은 우리나라 성리학 수용과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안향의 순흥안씨 가문은 고려 후기 명문가로서 발돋움하였고, 안향 이후 안축(安軸)·안보(安輔) 등 많은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여 순흥 지역의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안향의 고향인 순흥 지역에 건립된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말미암는다.
2. 부석사의 번창
부석사는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의해 의상(義湘)이 창건한 후 줄곧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서 역할을 하였다. 고려는 사격(寺格)에 따라 주지의 격을 달리했는데, 부석사는 지방 사찰 가운데 교종 계통의 최고 승계인 수좌(首座)가 주지를 맡았다. 따라서 고려시대 동안 불교계의 비중 있는 인물들이 주지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에는 원융국사(圓融國師) 결응(決凝)[964~1053]이 부석사에 머물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부석사에서 입적하였다. 의종 연간에는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의 아들 왕종린(王宗璘)[1127~1179]이 주지를 역임하였다. 또한, 공민왕 대에는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1307~1382]가 주지로 있으면서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특히 천희는 ‘부석국사(浮石國師)’라 불릴 만큼 화엄종의 중흥을 위하여 부석사 중창에 힘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