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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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從茂 |
영어음역 | Lee Jongmu |
이칭/별칭 | 돈문,설죽,양후,갑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전기의 무신.
[개설]
이종무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무신으로, 이 시기에 빈번하게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성질이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죽은 뒤에 용인시 고기리에 묻혔다. 태종 대에는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여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으며,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돈문(敦文), 호는 설죽(雪竹). 할아버지는 군기시윤(軍器寺尹) 이길상(李吉祥)이고, 아버지는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도원수(都元帥) 이을진(李乙珍)이다. 아들로 이승평(李昇平)·이덕평(李德平)·이사평(李士平)·이후평(李厚平)을 두었다.
[활동사항]
이종무는 젊어서부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등 무예에 능했다. 1381년(우왕 7)에 장군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에 임명되었다. 1397년(태조 6)에 옹진만호(甕津萬戶)가 되었는데, 왜구가 갑자기 들어와서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막아 싸웠으며,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진되었다가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통원군(通原君)에 책봉되었다. 1406년(태종 6)에 좌군총제(左軍摠制)에 임명되었으며, 장천군(長川君)을 봉하였다. 이듬해에는 의흥·충좌·웅무·신무사상호군(義興·忠佐·雄武·神武司上護軍)을 겸직하였다.
1408년(태종 8) 남양수원등처조전절제사(南陽水原等處助戰節制使)가 되었으며,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겸직하였다. 1409년(태종 9) 안주도도병마사(安州道都兵馬使)로 임명되었으며, 곧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승진되었다.
1411년(태종 11) 각위(各衛)에 절제사(節制使)를 두었는데,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가 되었다. 1412년에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에는 동북면병마도절제사겸판길주목사(東北面兵馬都節制使兼判吉州牧事)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의용위(義勇衛)를 설치하고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삼았다. 1419년(세종 1)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랐으며,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으며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삼았다.
후에 상원(祥原)으로 좌천되었다가, 1420년(세종 2)에 돌아와서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고, 이듬해에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으로 승진되었다. 1423년(세종 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동행했던 권희달(權希達)의 불경한 행동을 왕께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유배되었으나 배소로 가다가 과천에 머물렀다.
1425년에 다시 장천부원군이 되었다가 사망하니 평생을 왜구의 토벌에 전념한 장군이라 할 수 있다. 임금이 내관을 시켜 조상하고, 또 부의를 하사하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 속칭 능말에 있으며, 1975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갑주(甲胄)로 공로가 있음이 양(襄)이요, 생각함이 어둡지 아니함이 후(厚)란 의미이다. 임금이 제사를 하사하는 교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