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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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周源 |
영어음역 | Jeong Ju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도형 |
[정의]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활동사항]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8년 2월에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을 벌였으며, 4월에는 양지군 사동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9일, 안성에서 일본군 40여 명의 습격을 받고 교전을 벌였으며, 이후 죽산·양지에서 계속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한때는 의병의 수가 900여 명에 달하였다.
의병의 수가 늘어나자 정주원은 의병부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대는 정주원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수원군 수하 방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나머지 두 부대는 양지·죽산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1908년 4월부터는 충청도 지역으로 옮겨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당진·풍도·면천·서산까지도 진출하였다.
정주원은 1908년 7월 19일 충남 해미군 적서촌(赤鼠村)에서 일본군에 사로잡혀 그해 9월 29일 경기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동년 11월 24일 경성공소원에 항소하여 종신형을 얻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