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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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運動 |
영어음역 | Yahak Undong |
영어의미역 | Yongin Night School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연학 |
[정의]
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에서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사회 교육 운동.
[개설]
야학 활동은 일제강점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사설 야학과 관립 야학이 있었다. 관립 야학은 행정 당국이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공립 보통학교의 부수 사업으로 운영하였다. 사설 야학은 노동자, 농민, 부녀자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농촌 계몽 운동 성격의 교육이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강점기에 용인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된 사회 운동은 보통학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한 학교 설립 운동과 야학운동, 다시 말해서 교육 운동이었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인 1908년 이미 「사립학교령」을 만들어 서당과 사립 학교의 수를 제한하고,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민족 교육 운동의 싹을 잘라버렸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기만적인 문화 정치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보통 교육을 조금씩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3·1운동 이후 1920년대까지 전국 각지에 지방 유지층을 중심으로 보통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두 곳에 불과했던 용인의 보통학교 수가 1920년 5월에는 공립보통학교 5곳, 학급 수 20개, 학생 수 989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당시 다른 군에 비해 적지 않은 규모였다. 하지만 전체 아동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으며, 일제가 주창했던 ‘1면 1교’ 정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1920년와 1930년대 용인에서는 공립보통학교 및 각종 사설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경과]
용인에서의 보통 학교 설립 운동은 주로 각 면의 주요 유지들과 일반 면민들의 직접적인 후원과 서원 아래 이루어졌다. 그 방식은 주로 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식이었다.
먼저 용인군 모현면 모현공립보통학교의 설립 과정을 보면, 모현면은 광주와 용인의 접경 지역이라 교통이 편리하였지만 교육 기관은 강습소 몇 개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통학교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먼 거리를 걸어서 광주나 김량장면 등으로 통학을 해야 했다.
이에 따라 1926년부터 면민 정대용 외 74인이 ‘공립보통학교기성회’를 조직하여 1928년 말 약 6,000원의 성금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용인군 남사면 남사공립보통학교가 1만 면민들의 합심으로 1933년 개교하게 되었다.
한편, 1926년 당시 개교 20주년이 된 양지공립보통학교는 1924년 6년제로 변경되면서 교사를 증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자, 역시 후원회를 조직하여 유지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섭, 이시영, 이병옥 등 32명의 발기로 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결국 송병준 가(家)의 유지 송종헌이 5,000원을 기부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용인군의 각 면에서는 보통학교가 계속 증가하여 1933년 말 12개 면 중 구성면을 제외한 11개 면에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구성면에서도 그 해 12월 13일 유지 60여 명이 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여, 신문지상에 용인군에서는 1면 1교가 완성되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후 용인 지역에서는 보통학교 외에도 사설 강습소나 야학 등 각종 사설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용인 지역은 지리상 기후가 적당한 최적의 교육지로 평가되었는데, 1926년 당시 6곳의 보통학교와 야학들 외에 56개의 사립 강습소와 67개의 서당이 있었다. 사설 강습소로는 덕의강습소, 유신강습소, 용현강습소, 삼성강습소, 원삼강습소, 대대강습소 등이 있었다.
사설 교육 기관 설립의 예로서 용인군 외사면 옥산리의 옥산학원을 들 수 있다. 옥산리는 인근의 백암공립보통학교까지 가려면 걸어서 30리 길인 산간 벽촌이었는데, 마을의 청년 유지 한상규, 박영근, 안종윤 등이 옥산리의 중심지인 하산리에 사설 교육 기관인 옥산학원을 설치하였다.
건물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같은 마을 박재화와 박선규 집의 사랑채를 빌려서 1929년 2월 26일부터 무산 아동 50명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옥산학원은 교실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교육적으로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 해 여름방학에 경성에서 유학 중이던 박홍근이 고향으로 돌아와 ‘옥산학원건축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기성회에서 1929년 안에 학원을 건축할 것을 결의하자, 상산동창회에서는 자진하여 50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해 10월부터 기공하여 결국 1930년에 학교가 완성되었다. 이후 야학을 주학(晝學)으로 바꾸고 정식 명칭도 옥산학원으로 변경하였고,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면서 1931년 봄부터 박관선과 박영근의 주선으로 사업의 확장을 도모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