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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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州李氏 |
영어음역 | Gwangju Leessi |
영어의미역 | Gyeongju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
집필자 | 김장환 |
세거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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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시기/연도 | 임진왜란 전 |
성씨시조 | 이자성(李自成) |
입향시조 | 이결 |
[정의]
이자성을 시조로 하고 이결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연원]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본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에 세거해 온 호족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자 이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회안(准安)의 호장(戶長)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회안을 광주(廣州)로 고침으로써 관향을 광주로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 이당(李唐)이 출세하여 둔촌공(遁村公) 이집(李集)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면서 현족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용인시에 살고 있는 광주이씨 석탄공파(石灘公派) 중시조 이양중(李養中)은 고려 말에 형조참의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한 후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하지 않고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이방원과는 친구로서 태종으로 즉위한 뒤 한성부윤으로 임명하였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며 숨어 살았기 때문에 그의 뜻을 기려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 그 마을을 고덕리(高德里)로 부른 데서 오늘의 고덕동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입향경위]
부위공의 묘갈을 확인한 결과, 조부인 이순언(李純彦)의 부인이 용인이씨인 것으로 보아 처가가 있는 용구현에 이주해 살았던 것을 계기로, 임진왜란중 전사한 부의공의 삼남인 이결이 당시 장천이씨 세거지였던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황]
용인시 수지구 지역에서 현재까지 세를 이루고 있는 파는 이양중을 중시조로 하여 고기리 지역에 살고 있는 석탄공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