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826 |
---|---|
한자 | 書堂 |
영어음역 | Seodang |
영어의미역 | Village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윤식 |
[정의]
전통시대에 사족(士族)과 백성이 설립한 경기도 용인 지역의 사설 교육 기관.
[개설]
서당은 민간 사설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扃堂)에 있으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가 증대된 것은 16세기 사림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하는 것으로, 중종(中宗)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
16세기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명문 사족 출신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서당은 사립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설립에 필요한 기본 재산이나 법적인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존폐가 자유로웠다. 이 때문에 누구나 서당을 유지, 경영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소규모 자산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書堂契)가 나오면서 평민층이 대거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서당의 조직은 훈장과 학동이 많은 곳엔 오늘날의 반장격인 접장(接長)이 있었으며, 교육장소는 주로 방이었으나 여름철 더울 때는 나무그늘에서 멍석을 깔고 공부하였다. 교육시간은 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는데, 처인구 모현읍 왕산리에 있던 서당의 경우 주간에는 훈장이 한약방을 운영하여 야간에만 교육을 하였다.
[종류]
서당의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사숙, 또는 독서당(讀書堂)의 유형으로, 대개 문벌가나 유력가가 자제의 교육을 위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교육 경비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들 훈장은 퇴관 지식인이거나 과거시험에 낙방한 거자(擧子)들로서 지식 정도나 경륜이 높은 경우도 있었다. 둘째는 훈장 자신이 교육 취미나 소일을 위하여,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 수업하는 훈장 독영서당이다.
셋째는 훈장 자영서당으로, 훈장이 자신의 집에서 생계 유지나 소일을 위하여 개설한 서당이다. 이들은 촌학구(村學究), 또는 궁생원(窮生員)이라고 불렸는데,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 외에도 마을의 대서(代書)를 전담하였다. 넷째는 문중 연립서당으로, 지체가 비슷한 마을끼리 향촌 사회에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난 스승을 모시고, 각 마을의 재능 있는 청년 자제를 선택하여 교육시키는 고급 서당이었다.
교육 장소로는 인근의 서원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서당교육과 서원교육이 연결되는 성격을 지녔으며, 양반사회 진출을 위한 일종의 예비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용인 지역에 있던 서당들은 대부분 훈장 자영서당이었으나 이동읍 천리 이씨댁의 경우처럼 독서당의 형태를 띠거나 양지면 송문리의 문중 연립서당과 같은 곳도 있었다. 이들 서당의 경우 각처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이웃 아동들을 가르쳤다.
[주요 서당]
용인 지역에서 현재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서당들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양지면 대대리에 있던 음다라니서당과 역시 양지면 송문리에 있던 송문리서당, 남사면 완장리의 매능동서당과 상산마을의 상산서당 등이다. 이동읍 덕성리에 있는 서창골이란 지명은, 과거에 소씨(蘇氏) 집안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당과 서적창고를 지어 교육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900년대 초 풍서순(馮敍淳)[1874~1957]이 세운 음다라니서당에서는 동리 학동들에게 무료로 한문 교육을 시켰다. 당시 훈장의 대부분이 약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풍서순은 가정 형편이 빈한한데도 죽는 날까지 오직 교육에만 헌신하였다고 한다. 송문리서당 역시 무료로 교육을 시켰다. 이 때문에 송문리는 물론이고 인근의 마평리와 운학리 등지에서도 학동들이 와서 공부를 하였다.
매능동의 김교현이 자신에 집에 만든 매능동서당은 훈장을 초빙하여 1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4월에는 훈장인 여동욱이 학동들을 마루에 세워놓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한 후 교육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일로 여동욱은 경찰서에 잡혀 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는데, 그후에도 어린 학생들에게 틈틈이 민족 독립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상산서당은 상산마을 주민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만든 서당으로, 최대와 안준선이 야간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황]
용인 지역의 경우 1930년대까지는 서당 교육이 활발하였으나 1940년대 이후 초등교육의 확장과 신교육에 대한 이해가 폭넓게 확장됨에 따라 서당 교육은 쇠퇴일로를 걸어 196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