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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실의 명당자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899
한자 -明堂-
영어음역 Jijangsirui Myeongdangjari
영어의미역 The Tale of a Auspicious Site in Jijangsil Villag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집필자 김효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담|풍수지리담
주요 등장인물 점쟁이|아들 삼형제
관련지명 지장실
모티프 유형 명당 발복|풍수 금기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명당 이야기.

[개설]

지장실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 있는 자연마을로, 석성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산으로 빙 둘려 있다. 산세가 높아 비교적 험한 곳이 많은데, 예부터 명당자리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채록/수집상황]

1980년 6월에 용인읍 김량장리에 사는 홍종억이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85년에 출간한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하였다.

[내용]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라 한다. 어떤 고을 군수로 있던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들 삼 형제는 명당자리를 골라 여러 지역을 방황하다 석성산 밑의 지장실에 이르렀다. 이곳에 이르러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지역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명당자리였다. 이곳에 부친의 시신을 모신다 하더라도 훗날 누군가가 이자리를 탐내어 빼앗을 것을 염려한 삼형제는 여러 계책을 궁리하였다.

이들은 이 명당자리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판 다음 부친의 시신을 묻고, 석자 정도씩에 빈 관을 묻었다. 그같이 하여 몇 겹을 채운 다음, 봉분도 만들지 않고 자신들만 알게끔 표시를 해두고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들 삼 형제에게는 영화로운 일만 생기고 가산도 나날이 불어났다.

한편, 용인에서는 가뭄이 계속되어 농작물이 타죽고 급기야는 식수마저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가문이 극에 달하자 지장실은 물론 용인 주민 모두가 깊은 걱정에 빠지고 말았다. 마을의 어느 한 사람이 용하다고 하는 점쟁이에게 찾아가 왜 가뭄이 그치지 않는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하는 말이, 지장실 어떤 곳에는 예부터 다른 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명당자리가 있어 이 덕으로 용인 사람이 혜택을 입어 왔는데, 요 근래 어떤 사람이 그곳을 파헤쳐 손상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드시 시신을 묻었을 터이니, 그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곧 비가 내려 가뭄을 면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점쟁이를 앞세우고 명당자리를 찾아나섰다. 온종일 찾아다녔지만 지장실 부근에는 새로 세운 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점쟁이가 거짓말을 했다고 불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점쟁이는 포기하지 않고 성산 주위를 수없이 헤매며 명당자리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점잼이도 며칠 동안 혼자 헤매다 기진하여 포기한 채 하산하려 하였다. 산꼭대기에서 잠시 쉬며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피던 점쟁이는 홀연 지장실 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발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곳을 찾아보았으나 새 묘소는 없었다. 더욱 낙심한 점쟁이는 그만 풀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니 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을 제외하곤 풀이란 풀은 거의 다 말라죽어 있었다. 흙색깔도 유난히 기름져 보였다.

하도 이상해서 점쟁이는 마을 청년들을 불러다 그곳을 파보자고 하였다. 점쟁이로부터 일당을 받고서야 땅을 파기 시작하던 청년들은 한 석자 정도 파헤쳤을 때 관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쳤다. 점쟁이 말대로 관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서둘러 관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있어야 할 시체가 없었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청년들은 욕설까지 퍼부으며 하산하였다. 점쟁이는 반드시 이곳에 누군가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혼자라도 파볼 생각으로 연장을 잡았다.

며칠 동안이나 팠을까, 또 하나의 관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빈 관이었다. 점쟁이는 이처럼 빈 관을 묻어둔 것은 시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파들어갔다. 끼니를 잊은 채 땅을 파내던 점쟁이는 기진해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손톱도 다 달아서 손 사이마다 피가 엉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점쟁이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파내어 열두 개나 되는 빈 관을 파낸 다음, 또 하나의 관을 들어냈다. 이 관을 열자마자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마을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산으로 달려와 점쟁이를 만나고자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 올라와 명당자리를 보니 위에선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패어 있고, 그곳에는 점쟁이가 기진한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나기를 맞으면서도 점쟁이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하산한 뒤 점쟁이의 고생을 생각하며 장례를 치렀다. 점쟁이의 장례가 끝나고 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비는 계속 내려 그간 말랐던 땅을 흡족하게 적셨으며, 물이 둔전에까지 흘러서 둑을 쌓아 막았을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지금도 그 명당자리가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보통 사람은 절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명당을 얻으면 그 효험이 나타나는데, 바로 나타나 금시발복하는 경우도 있고, 몇 년 후에 발복하는 경우도 있다. 발복의 내용을 보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어 부자가 되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자손이 없는 사람은 자손을 얻고, 신분 상승을 원하는 사람은 본인의 노력, 또는 남의 도움을 받아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다.

이처럼 명당은 결핍된 재물, 명예, 배우자, 자손, 건강 등을 얻는 복된 땅이다. 또한 명당은 대지의 비밀이므로, 꼭 필요한 사람 외에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비밀이 널리 알려지면 명당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용인 지역은 ‘사거용인(死去龍仁)’이라는 말로 대변되었듯 명당지가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조선왕조 이후 한양과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말미암아 고려 후기 이후부터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수많은 분묘가 입지하고 있다.

풍수 관련 설화는 서민의 풍수적 인식 및 태도를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한 소재가 된다. 이는 서민들의 옛 분묘가 존재하지 않아 음택적 연구대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민들은 문자로 된 기록 대신 설화를 통해 영향력 있는 풍수적 인식 및 태도를 전승시키기 때문이다.

용인에서는 이러한 풍수 설화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 유형은 풍수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내용, 두 번째 유형은 명당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내용, 세 번째 유형은 지관과 관련한 내용, 네 번째 유형은 특정한 산에 무덤을 쓰면 마을에 가뭄이 든다는 풍수 금기(禁忌)에 관한 내용, 다섯 번째 유형은 풍수적 형국에 대한 유비적(類比的) 인식이다.

「지장실의 명당자리」는 네 번째 유형으로, 마을의 명당에 무덤을 쓰자 마을은 물론이고 용인 전 지역에 가뭄이 들었다는 내용으로, 한 점쟁이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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