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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17
한자 許坤妻慶州金氏旌閭
이칭/별칭 부안 경주 김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선돌로 814-7[월천리 산11-1]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44년연표보기 - 허곤 처 경주 김씨 정려 건립
현 소재지 허곤 처 경주 김씨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선돌로 814-7[월천리 산11-1]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사모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태인 허씨 문중
관리자 태인 허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에 있는 조선 시대 정려각.

[개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충효 사상과 정절을 으뜸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하여, 충효열(忠孝烈)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려(旌閭)를 내려 백성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정려의 종류에는 정려비와 정려문, 정려각 등이 있다. 허곤 처 경주 김씨 정려(許坤妻慶州金氏旌閭)는 조선 시대에 허곤(許坤)의 처 경주 김씨(慶州金氏)[1736~?]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경주 김씨의 아버지는 김성흡(金聖翕)이다. 경주 김씨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7세의 어린 나이에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며 잠도 자지 않았고, 아버지가 먹다 남긴 음식 이외에는 일절 먹지 않았다. 뒤에 아버지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17세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허사문(許斯文)의 후손 허곤에게 시집을 갔으나 부부가 모두 홍역에 걸렸다. 이때 친정인 김제(金堤)에 가 있던 경주 김씨는 병이 조금 나았으나, 부안에 있던 남편은 얼마 뒤에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경주 김씨는 즉시 시집으로 달려가 통곡하면서 남편을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시아버지가 꾸짖으며 남편의 장사를 치르게 한 다음 잠시 친정에 가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고을의 수령이 경주 김씨를 탐하여 그 아버지를 협박하였다. 이를 비관한 경주 김씨는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 후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사람들은 경주 김씨의 원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라에서 어사를 파견하여 정려를 세우자 큰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세간에 전하고 있다. 경주 김씨가 실제로 정려의 명을 받은 때는 1814년(순조 14)이며, 정려가 건립된 때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44년(헌종 10)이었다.

[위치]

허곤 처 경주 김씨 정려는 부안군 보안면 선돌로 814-7[월천리 산11-1번지]에 있다. 태인 허씨(泰仁許氏)의 재실인 추원재(追遠齋)에서 북쪽으로 약 40m 거리에 있다. 부안군 주산면 선돌로를 따라가다 보면 부곡 버스 정거장 바로 오른쪽에 한자로 ‘追遠齋’라고 써 놓은 큼직한 돌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추원재가 나오고, 추원재에서 다시 묵방산 자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정려각과 비석이 있다.

[변천]

1814년에 정려의 명을 받았고, 1844년에 정려를 건립하였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려각의 정면은 186㎝,측면은 156㎝이다. 앞쪽의 초석 2개는 원형이며, 뒷쪽의 초석 2개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사모지붕의 정려각 안에 현판이 2개 걸려 있다. 하나는 ‘효열녀학생허곤처경주김씨지려(孝烈女學生許坤妻慶州金氏之閭)’라고 적혀 있는 현판으로 정려 후면 벽에 걸려 있다. 그 앞쪽에는 1754년(영조 30)에 어사 홍재승(洪榟承)이 왕명으로 지어 ‘어제운(御製韻)’으로 시작하는 제문이 적혀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각 앞에는 ‘효열녀경주김씨정려기적비(孝烈女慶州金氏旌閭記蹟碑)’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경주 김씨의 자세한 효열 사적이 적혀 있는데, 1999년 9월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기적비의 크기는 높이 185㎝, 너비 54㎝, 두께 24㎝이다.

[현황]

허곤 처 경주 김씨 정려태인 허씨 문중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이후의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효자와 열녀들에 대한 정려 발급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고종 연간에 조정에서 허가한 정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남발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충효열에 대한 조정의 포상책이 빈곤한 재정을 메우기 위한 보충 수단으로 전락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또한 가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금전을 동원해서라도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아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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