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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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濟臣 |
영어공식명칭 | Go Jesin |
이칭/별칭 | 고문경(高文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순순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0월 27일 - 고제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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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고제신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8월 - 고제신 복역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1월 30일 - 고제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고제신 건국 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고제신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부안현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고제신(高濟臣)[1883~1943]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1910년 초반부터 부안, 고부, 김제, 고창 등지를 주요 무대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거나 독립 자금 마련에 힘썼다. 특히 1919년 상하이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군자금 조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의 훈호를 받은 고희(高曦)[1560~1615]의 10세손이다.
[활동 사항]
고제신은 지금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에서 태어났다. 1912년부터 동지 한우석(韓禹錫)과 함께 부안, 고부, 김제, 고창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주었다. 1917년에는 광복회 단원인 유장렬(柳璋烈) 등과 함께 전라남도 보성군의 부호인 서인선(徐仁善)을 찾아가 독립 운동 자금 1만 원을 모금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고제신은 한우석과 함께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일본 고관 총살단을 조직하고 권총을 구입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실행이 어렵게 되자 임성태(林聲泰)·한우석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으로 전환하였다. 그 해 4월 16일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송상리의 박병한(朴炳瀚)으로부터 198원을 모금한 것을 비롯하여 1923년까지 계속하여 많은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922년 고제신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 부호(富豪)를 위협하여 1만 4000원을 빼앗은 혐의 등으로 한우석, 유창렬 등과 경찰에 붙잡혀 함께 옥고를 치렀으며, 1924년 8월 전주지방법원에서 9년 형을 얻도받고 복역하였다. 1933년 만기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공로 국민 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