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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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勞動法改定鬪爭 |
영어의미역 | Movement for Amendment of Labor Laws in 1988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하경 |
성격 |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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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8년 |
종결연도/일시 | 1988년 - 노동법 개정 투쟁 전개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마산|경상남도 창원|연세대학교 노천극장 |
관련인물/단체 |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전국노동자대회 |
[정의]
1988년 경상남도 창원 지역 노동자들이 참가한 「노동법」 개정 투쟁.
[개설]
노동법개정투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동운동의 집약적 표현이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형태적 투쟁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 노동자들의 조직 역량을 결집시킨 역사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운동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노동자의 투쟁은 단위 사업장에서의 임금인상투쟁이나 노조결성투쟁, 민주노조사수투쟁의 차원을 넘는 단계로 진입하였다.
현행 「노동법」 중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꼽은 것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저해하는 「노동조합법」 3조 5항, 제12조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제3자 개입금지, 임시총회 소집권자의 지명권을 행정관청이 부여하는 26조 3항 등이다. 그밖에 공무원 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 방위산업체의 쟁의금지 철폐, 「교육관계법」 개정을 통한 교원노조의 합법화 등도 포함된다.
[역사적 배경]
1988년 상반기 임금인상투쟁을 폭발적으로 전개한 노동자들에게 합법적인 투쟁 중 80%를 불법쟁의로 간주함으로써 극심한 탄압이 가해졌다. 이로 인해 「노동법」을 개정하는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발등에 떨어진 시급하고 불가피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이 여소야대라는 결과로 나타나자 「노동법」 개정에 대한 야권의 기대와 책임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결성 초기부터 단위노조와 지역별 연합체라는 조직의 모순과 갈등에 부딪쳤다. 업무 집행 조직은 기존 노동조합의 조직과 궤를 같이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노조의 범위를 넘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 “3자 개입 웬 말이냐?”는 구호가 나온 배경에는 이런 조직적 요구가 깔려 있었다.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조직의 취약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노동법」을 개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노동법」의 개정은 지역과 업종을 넘어 전국의 모든 노동자가 하나가 되어 단일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 연대에 앞장선 것은 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목적]
노동법개정투쟁은 7·8월 노동자대투쟁을 계승하고 1988년 임금인상투쟁을 통해 성장한 노동자 대중의 생존권적 요구와 민주적 권리를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발단]
구사대 폭력이나 위장 폐업 등에 맞서 지역 차원의 공동 연대투쟁도 벌였지만 전국투쟁으로 힘차게 전개되지는 못한 것은 현행 「노동법」의 제반 독소 조항 때문이었다. 노동자의 자주적 삶을 억압하는 굴레를 벗어던지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현행 「노동법」의 제반 독소 조항을 뜯어고치는 제도 개선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노동자 앞에 긴급한 임무로 제기된 「노동법」개정투쟁에 1988년 하반기 투쟁을 결집시켰다.
[경과]
전국 노동자들은 1988년 6월 3일 전국노동법개정특별위원회(약칭 전국노개정특위)를 구성한 후 본격적 준비 활동에 들어가, 야권 3당 합동 「노동법」 개정 시안 마련, 야권 3당 합동공청회, 전국대표자회의, 각 지역 특위활동, 권역별 등반대회, 지역별 조합별 집회, 서명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0월 6일 지역별·업종별 노동조합협의회와 전국노동운동협의회는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약칭 노개정투본)를 구성하고, 11월 13일 서울 전국노동자대회 개최를 결의했다.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전국에서 노동자 4만여 명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을 빼곡하게 메운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 날은 전국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날이었다. 1천여 명이 참석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제1회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하였다. ‘노동악법 철폐’의 구호가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피로 쓴 ‘노동해방’이라는 플래카드가 펄럭이면서 대회는 절정에 달했다.
대회를 마친 4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향해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노천극장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대열은 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행렬이 연세대학교 정문을 다 빠져나가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각종 플래카드와 만장, 깃발을 치켜들고 질서 있게 행진하는 대열의 위력에 놀란 당국은 원천봉쇄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꿔 순순히 행진을 열어 주었다. 오후 6시 경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할 때까지, 연도에 선 시민들은 시위대가 나누어 준 선전물을 받아들고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국투쟁본부 주최로 망국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정촉구대회가 열렸다.
[의의와 평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 변혁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 온 학생운동이 물러가고 노동자가 중심 세력으로 등장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12월 23일 창설된 지역별·업종별 전국회의는 전국노동자대회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로 기록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