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96
한자 成勝
이칭/별칭 적곡(赤谷),충숙(忠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성승 겸사복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성승 대호군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46년 - 성승 중추원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48년 - 성승 경상도우도 봉기
활동 시기/일시 1451년 - 성승 의주목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56년연표보기 - 성승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84년 - 성승 복관
추모 시기/일시 1791년 - 성승 시호 내림
사당|배향지 장릉 충신단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창녕
대표 관직 의주목사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묘소가 있는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자 조선 전기 무신.

[가계]

성승(成勝)[?~1456]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호는 적곡(赤谷)이다. 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後) 성석용(成石瑢)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성달생(成達生)이다. 아들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成三問)과 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 등이다. 성석용은 15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음직으로 낭장(郞將)이 되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처음 시행된 무과에서 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었다. 성승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성승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433년(세종 15) 겸사복(兼司僕)으로 있을 때, 우연히 왕세자가 탄 말이 진흙 속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자 성승이 진흙 속으로 달려 들어가 세자를 붙들고 나왔다. 1438년(세종 20)에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1440년(세종 22)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경상도병마절제사(慶尙道兵馬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442년에 창성도호부사(昌城都護府使)로 재임 중에 어머니의 상을 입었다.

1446년(세종 28)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다음해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다녀오고, 1448년(세종 30)에 경상도(慶尙道) 우도처치사(右道處置使)에 임명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정조사(正朝使) 부사로 명에 다시 다녀왔다. 1451년(문종 1) 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단종이 재위 중에 충청도병마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맡았다. 세조가 왕이 된 1455년(세조 1)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단종을 위협하여 세조가 선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병을 핑계로 집으로 물러나 칩거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아들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거사가 발각되어 1456년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다른 모의자들도 함께 처형되었다.

[묘소]

성승의 묘소는 노량진과 홍주 두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1784년(정조 8)에 복관되었으며, 1791년(정조 15)에 충숙(忠肅)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1.24 내용 변경 [활동 사항] 능치처사되었다. →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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