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01
한자 李塏
이칭/별칭 청보(淸甫),백고(伯高),백옥헌(白玉軒),충간(忠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차인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7년연표보기 - 이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6년 - 이개 문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456년연표보기 - 이개 사망
사당|배향지 창절사(彰節祠)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
사당|배향지 충곡서원(忠谷書院)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로269번길 60-5
사당|배향지 낙빈서원(洛濱書院)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집현전 부제학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이개(李塏)[1417~1456]는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을 역임한 이종선(李種善)이다. 아버지는 세조 때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계주(李季疇)이며, 어머니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활동 사항]

1450년 박팽년세종이 총애하였던 승려 신미(信眉)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면과 문책을 당하자, 이승소, 유성원 등과 자발적으로 나서 함께 벌 받기를 청한 바 있다. 또 이개는 여러 공을 세워 증직되거나 상을 받으면, 자신에게 공로가 없음을 들어 사양하고, 자신이 상소한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을 청하는 강직한 성품의 신하였다.

이개는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 직후, 황보인, 김종서를 따르던 인물들을 색출하여 역모 죄로 물을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용(李瑢), 허후(許詡), 조수량(趙遂良), 안완경(安完慶), 조순생(趙順生), 이석정(李石貞), 지정(池淨), 이보인(李保仁) 등이 성삼문이개에 의해 역모죄로 처벌되었다.

이개는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의 거병과 관련하여 그 형제인 이징석(李澄石)과 이징규(李澄珪) 등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징옥은 김종서 휘하에서 4군6진 개척에 공을 세운 무장이었는데,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에 반대하여 정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정변은 수일 만에 실패하고 이징옥과 아들은 죽었지만, 이개는 주변의 반대에도 그 형제들도 마땅히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개는 정난(靖難)의 공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수양대군의 집정 하에서 자신의 상소가 윤허되지 않은 일이 빈번하였고, 이징석, 이징규 형제가 오히려 수양대군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극형을 주장했던 일이 문제로 돌아오기도 했다.

1456년(세조 2) 6월 2일, 이개박팽년, 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자들과 함께 세조를 시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공모자 김질(金礩)의 고발로 실패에 그쳤다. 이개는 작형(灼刑)[인두로 신체를 지지는 단근질 형벌]을 당하면서도 의연했다고 전한다. 이개를 비롯한 주요 연루자들은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마차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당한 뒤 3일 동안 저자거리에 효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한 후 집현전 저작랑으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또 세종의 명으로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고, 신숙주 등과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묘소]

현재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사육신의 무덤이 사육신역사공원으로 조성 관리되고 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노량진이 사육신의 거열형 집행 후 효시 장소라는 풍문이 있으며, 태학사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비명을 찬술하여 1782년(정조 6)에 건립한 사육신 신도비에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육신의 시신을 일부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고 하는 설이 실려 있다. 사육신공원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인 외에도 김문기(金文起)의 가묘가 추가되었으며, 원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숙종대 사육신이 관직 복권되면서, 1681년(숙종 7) 이들의 묘소로 알려진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 배향 사당이 건립되었다. 1691년(숙종 17) 12월에는 ‘민절사(愍節祠)’로 사액되었다가, 이듬해 1월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고쳤고 신도비가 세워졌다. 민절사는 현재의 사육신역사공원 내에 위치하였으나 터만 남아있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현재 충청남도 홍성]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연산((連山)[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충곡서원(忠谷書院),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1.31 내용 변경 [묘소] 사육신 신도비명 내용 일부 수정
2024.01.12 내용 변경 [묘소]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육신전(六臣傳)」에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의 시신을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가묘로 조성했다고 하여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 태학사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비명을 찬술하여 1782년(정조 6)에 건립한 사육신 신도비에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의 시신을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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