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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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年大洪水 |
영어공식명칭 | A Great Flood of 1933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정의]
1933년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에 발생한 대홍수.
[개설]
1933년의 대홍수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일어난 유사 이래 최대의 홍수였으며, 사망자 8명, 가옥 파괴 300여 호, 피해액 30여만 원에 달하였다. 이때의 수해로 군민들은 시민대회를 열어 당국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1936년부터 영호강 사방 공사가 시작되었다.
[역사적 배경]
경상남도 서북부의 내륙 산간에 자리한 거창은 일교차와 연교차가 심하고, 비교적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 속한다. 거창군청 홈페이지의 1993년도 통계에 의하면, 1년 총강수량이 1,395.2㎜이며, 여름철인 6월~9월 사이의 강수량은 928.5㎜로 총강수량의 약 66%에 해당된다. 근대 이후 거창 지역의 대홍수 사례로 『거창읍지』(2012)에서는 1917년 정사년 대홍수, 1920년 경신년 대홍수, 그리고 1936년 병자년 대홍수를 들고 있다.
1917년 여름의 정사년 대홍수에는 당시 군수였던 이찬영이 천외 지구의 이재민을 구출하러 거창교를 건너다 다리가 유실되면서 강물에 휩쓸려 순직하였다. 1920년 여름의 경신년 대홍수에는 영호강의 거창교와 제방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세간의 가장 큰 화제가 된 유사 이래 최대의 홍수는 1933년 대홍수이다.
[경과]
1933년에는 홍수가 시작된 6월 28일 하루에만 305㎜의 강우량을 기록하였으며, 7월 2일 205㎜, 7월 24일 127㎜ 등 연일 기록적 폭우가 이어졌다. 8월 3일에는 영호강이 범람하여 제방 20개소가 붕괴되어 읍내가 물바다가 되었고, 사망자 2명에 가옥 60여 호가 침수·파괴되었으며, 전답 260정보[2,578,512.4㎡]가 유실되는 등 그 피해액이 7,500원에 달했다. 9월 3일에도 폭우가 내려 가옥 20호가 파괴되고 840호가 침수되었으며, 군수 관사까지 화를 입었다. 이날 내린 비로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44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서도 한 마을 55호가 전멸하는 등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동아 일보』에서는 신원면의 산사태로 인해 7일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튿날 9월 4일에도 폭우가 이어져 거창읍의 가옥 25호가 파괴되고 300호가 침수되었으며, 유서 깊은 침류정도 유실되었다.
[결과]
9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이어진 폭우가 그친 후, 9월 12일 『동아 일보』는 거창군에서 1933년 한 해 동안 총 4회에 걸친 수해로 인해 그 피해액이 30여 만원에 달하며, 파괴된 가옥이 300여 호, 인명 사상은 사망 8명, 행방불명 2명, 중경상자 23명으로 총 32명이라고 보도하였다. 가축 피해는 소 4두 등 다수이며, 당장 복구가 불가한 전답 2백여 정보, 농작물의 피해와 침수된 가옥은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다고 하면서, 이는 곧 “창군 이래 처음”의 기록이라 했다.
9월 7일 군민들은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경상남도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 결과 1936년부터 사방 공사 10개년 계획에 따라 영호강 사방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 홍수 피해가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1936년 병자년에는 8월 중순부터 시작된 비가 8월 말까지 이어져 도로와 교량이 파괴되고 10여만 원의 농작물 피해가 발생했다[병자년 대홍수]. 이듬해인 1937년에도 장마가 졌으며, 1939년의 대가뭄에 이어, 1940년 다시 장마가 이어졌다. 일제 말 아시아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일제의 수탈이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이처럼 연이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지역민의 삶은 더없이 피폐해졌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자연재해의 사례를 통해 지역민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