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78
한자 四月革命
이칭/별칭 4·19 혁명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0년 3월 15일 - 4월혁명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4월 11일 - 4월혁명,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 발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4월 26일 - 4월혁명, 이승만 대통령 사퇴
전개 시기/일시 1960년 5월 5일연표보기 - 4월혁명 거창 농업 고등학교와 중학생 등의 가두 시위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60년 5월 10일 - 4월혁명, 거창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박영보 전 신원면장 살해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60년 6월 22일 - 4월혁명,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던 거창군수와 읍장을 반대하는 벽보 게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7월 29일 - 4월혁명, 장면 정부 수립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1월 18일 - 4월혁명,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 공동 묘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12월 - 4월혁명, 지방 자치 단체 선거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4월 17일 - 4월혁명 1주년 기념 한시 백일장, 거창 향교에서 개최
종결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 - 4월혁명 종결
성격 사회 운동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1960년 3·15 부정 선거부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전까지 전개된 사회 변혁 운동.

[개설]

1960년 4월혁명 시기 거창군민들의 사회 변혁 움직임은 먼저 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울분을 표출하고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집단 행동으로 나타났다. 거창 지역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기성 정치 체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였고, 거창군민들은 기존 자유당 체제를 지지하던 관료 임명을 거부했으며, 현직 교사들은 교육감 직선제를 주장했다. 거창군민들은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 자치 단체 선거를 통해 독재 잔재 세력들을 심판함으로써 사회 민주화 열망을 표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50년대 말 이승만 정부는 국가 보안법 개정, 언론 탄압, 진보당 당수 조봉암 처형 등 반민주적인 정치를 지속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한 대규모의 조직적 부정이 저질러지자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1960년 4월 11일 경상남도 마산시[현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반정부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전개된 시위는 1960년 4월 19일 정점에 이르렀고,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하하면서 독재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허정 과도 정부가 성립되었고, 1960년 7월 29일 선거를 통해 장면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어 정치·사회·경제 각 부문에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국민들은 확장된 사회 변혁 운동의 공간에서 부정 선거 책임을 규명하고,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를 달성하며, 분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이승만 정부의 부정 선거는 이미 1958년 국회 의원 선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에서는 가조면장이 선거 위원 추천 마감일까지 나타나지 않아 민주당 측의 선거 위원이 서류 접수를 하지 못해 선거 위원으로 추천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완대리의 동장은 선거에서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면장이 이를 거부하여 야당 측 인사에 대한 공직 추방 공작이라는 언론의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한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지서 앞에 세워 놓은 여러 선거 홍보 간판 중에서 야당 입후보자의 홍보 간판만이 사라져 버린 일도 있었다.

1960년 4월혁명 시기 거창 지역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국회와 기성 정치 체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출하였다. 1960년 5월 5일 거창 농업 고등학교 남녀 학생 약 3백여 명과 중학생 약 60여 명이 ‘국회는 즉시 해산하라.’, ‘기성 정치인 물러가라.’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하면서 거창 읍내를 행진하였다.

거창 지역은 4월혁명 시기 전국적인 관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1960년 5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와룡리·대현리 주민 70여 명은 거창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묘지를 정리하고 위령비를 세우기 위해 모였다. 이 과정에서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던 신원면장 박영보의 집을 파괴하고 그를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다수 거창군민들은 10여 년간 독재 체제 아래서 억눌려 지내던 유족들이 자신들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우리 사회에 던지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라고 인식하였다. 서울에 유학하고 있던 거창 학생들은 5월 18일 ‘거창 양민 학살범을 즉시 처단하라.’라고 적은 현수막을 들고 국회와 서울시청, 법무부, 대검찰청을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이후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국가 차원의 사회 문제로 부각되어 재수사가 진행되었고, 국회가 경상남도 함양군·통영시, 부산광역시, 경상북도 문경군, 전라남도 함평군 등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6개월에 걸쳐서 거창 군민들이 노력한 결과 1960년 11월 18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 공동 묘비가 건립되었다.

1960년 6월 22일에는 거창읍내 거리에 이승만 정부를 열성적으로 받들던 군수 천사득(千思得)과 읍장으로 내정된 이태웅(李泰雄)을 배격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거창의 교사들도 교육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1960년 12월 거창의 한 교사는 교육 제도를 개혁하여 현직 교사들이 교육감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였다.

1960년 4월혁명에서 제기된 사회 민주화와 사회 변혁에 대한 거창 지역의 민심은 선거를 통해서 드러났다. 1960년 7월 29일 국회 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의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전국에 총 52명의 후보를 내어 2명이 당선되었다. 거창 지역에는 4월혁명 후 자유당 조직이 완전히 붕괴됨으로써 자유당 간판을 달고 출마한 사람은 없었다. 거창군민들은 앞 선거와는 다르게 4월혁명 후 첫 선거에서 기존 야당이었던 민주당 인물을 선택하였다.

1960년 12월에 지방 자치 단체 선거가 실시되었다. 12월 12일 도 의원 선거에서 정원 2명 중 1명이 자유당 출신이었다. 12월 19일 읍면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1956년 제2대 읍면 의원 135명 전원이 자유당 소속이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와 총원 132명 중 13명만이 자유당 출신이었다. 12월 26일 면장 선거에서 12개 읍면 중에서 3개 면에서 자유당 출신 인사가 선출되었다. 거창 지역에서 이승만 정부를 뒷받침하던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4월혁명 후 도 의원 선거에서 50%, 읍면 의원 선거에서 약 10%, 면장 선거에서는 25%를 차지하였다. 한편, 1960년 12월 27일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장 선거 개표 과정에서 투표수가 투표 용지 교부수보다 5매가 더 많아 개표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개표 결과 3표 차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거창군민들은 1961년 4월 17일 4월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한시 백일장을 거창 향교에서 거행하는 등 4월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과]

1960년 3월부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전까지 거창 지역의 사회 변혁 운동은 여러 부문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지방 자치 단체 선거에서 드러나듯이, 구체제 출신 인물들이 소수이긴 했지만 여전히 지역 정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역 실정에서 5·16 군사 쿠데타 발생 후 정부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 유족회 간부들을 구속하고 유족회를 해산시켰을 때 거창군민들의 큰 저항은 없었다. 군사 정부는 박영보 전 면장 피살 사건 용의자도 구속하였고, 박산골 합동 묘역 개장 명령을 내리고 위령비를 정으로 쪼아 파묻었다. 5·16 군사 쿠데타 후 거창 지역에는 1961년 6월 재건 국민 운동 거창군 촉진회가 결성되는 등 4월혁명을 부정하고 군사 쿠데타를 옹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의의와 평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진실 규명 요구로 표출된 거창군민들의 사회 변혁 열망은 이승만 독재 정부가 저지른 비인간적, 반민주적인 악행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이 진실 규명 요구가 도화선이 되어 전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실체를 조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1960년 국회 의원과 지방 자치 단체 선거에서 반민주·독재 지지 세력을 완전히 탈락시키지 못했지만, 자유당 세력을 배제하는 투표 성향을 보임으로써 민주 사회로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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