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곡동 금곡마을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23
한자 金谷洞金谷-堂山祭
이칭/별칭 금곡동 금곡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금곡마을 가운데지도보기
의례 장소 큰할미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금곡마을 논 가운데지도보기
의례 장소 작은할미당산[꾀꼬리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금곡마을 삼괴정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신당/신체 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큰할미당산[들돌]|작은할미당산[입석]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금곡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에 모셨던 마을 공동 제사.

[개설]

금곡동 금곡마을 당산제금곡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며 세 곳의 당산에서 지냈던 마을 제의로, 정월 열나흗날 자정 무렵에 모셨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8.15해방 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다시 중단되었다.

[연원 및 변천]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금곡마을은 쇠가 많이 난다고 하여 '금곡'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김덕령(金德齡)[1568~1596] 장군이 임진왜란 시기에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제철을 하던 주검동이 금곡마을에 있었다고 전한다. 요즘은 철보다는 무등산수박 재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현재의 마을은 남평문씨(南平文氏)가 500여 년 전에 임진왜란을 피해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곡마을의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때 미신이라는 이유로 중단되었다가 8.15 해방 후 복원하였으나 곧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신당/신체의 형태]

금곡마을의 당산은 총 세 곳으로 할아버지당산, 큰할미당산, 작은할미당산으로 불린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가운데 위치한 느티나무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땅 주인인 일본인이 느티나무를 베어버리고 이팝나무를 심었다. 큰할미당산은 논 가운데 위치한 들돌이었는데, 주인이 논둑을 막는 데 사용해 사라졌다고 한다. 작은할미당산은 남근 형태의 입석으로 꾀꼬리당산이라고도 불렸는데, 마을 내 삼괴정 옆으로 옮겨져 있다.

[절차]

금곡동 금곡마을 당산제는 정월 초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관과 화주 등을 선정한다. 제관 3명과 축관 1명은 깨끗한 마을 어른으로 선정하는데, 제관들은 제의(祭儀)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화주는 제물(祭物)을 장만하는 사람으로 당산제 사흘 전부터 부정한 곳에 가지 않고 날마다 목욕을 하며, 화장실에 다녀와도 옷을 갈아입는 등 금기를 지켜 생활한다. 제물은 마을 공동답의 수익으로 충당하는데, 돼지머리, 과일, 채소 등을 준비하며, 제일(祭日)인 정월 열나흗날에 화주 부부가 깨끗하게 장만한다. 이 제물들은 당산제를 지내러 갈 때 마을 총각들이 한 가지씩 정성스럽게 운반한다.

정월 12일에 마을 입구와 당산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려 부정한 것들의 출입을 막는다. 당산 제일(祭日)인 열나흗날 자정 무렵, 농악대가 굿을 치면서 마을을 한바퀴 돌고 할아버지당산으로 먼저 간다. '진설→ 재배→ 헌작→ 재배→ 강신→ 소지→ 음복→ 헌식' 등 일반적인 유교식 제차(祭次)대로 당산제가 진행되며, 이어 큰할미당산과 작은할미당산 순으로 제를 모신다. 마을 소지와 개인 소지를 올려 마을과 각 가정의 안녕을 기원한다.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마을에 이를 알려 각 가정에서도 조상들의 제를 모신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대보름부터 마당밟이를 며칠 동안 행하였다고 한다.

[현황]

금곡동 금곡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복원하였으나 곧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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