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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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이칭/별칭 | 한국전쟁,6.25사변,6.25동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원석 |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 인민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
[개설]
북위 38도선[삼팔선] 곳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총공세를 펼치면서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6.25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미군 제24사단과 싸워 대전을 점령하였다. 7월 하순에 접어들자 북한 인민군은 경상도를 뺀 남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8월 말에 들어서면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90%의 땅을 점령하였다.
대구와 부산을 근거지로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해서 북진하였으며 9월 28일 수도였던 서울을 수복하였다. 북위 38도선까지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의 북진 중지 요구를 무시하고,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한 뒤 계속해서 북진하며 중국 경계선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에 10월 25일 중국인민해방군[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세는 다시 뒤집어졌다.
혹한과 유격전을 적극 활용한 중국인민해방군의 공세에 밀려 평양과 흥남,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에서 차례로 철수하였다. 경기도 오산 근처까지 밀려났으나 다시 반격하여 3월 14일 서울을 되찾았다. 그 뒤로는 북위 38도선을 두고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포로 교환 문제로 벽에 부딪혔으며, 이 문제를 합의하는 데 1년 6개월이 걸렸다. 휴전회담이 지지부진하는 와중에도 전투는 더욱더 치열해져 남한과 북한 모두 피해는 더욱 가중되었다. 지지부진하던 휴전 협정은 1953년 7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합의를 이끌어 7월 23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6.25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경과]
6.25전쟁은 주로 중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광주를 포함한 호남 지역은 주요한 전투의 장이 아니였기 때문에 격렬한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는 1950년 7월 23일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동림동 옛 산동교(山東橋)에서 벌인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 전적지이다. 치열하지는 않았으나 산동교는 호남 지역에서 낙동강 전선인 마산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방어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였다.
이날 장성에서 퇴각한 제5사단 26연대 병력과 500여 명의 경찰로 편성된 군경 합동부대는 1시간 가량 전투를 벌였으나 북한 인민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군경 합동부대는 옛 산동교를 폭파하고 광주와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퇴각하였고, 북한 인민군은 사실상 광주에 무혈입성하였다.
북한 인민군이 광주 지역을 점령하자 지역 좌익 세력들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었고 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등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광주의 치안에 나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 죄수와 일반 죄수를 석방하고 우익 인사를 색출하였다. 낙오된 군경이나 우익 정당 및 단체의 임원·재산가 등이 검거되어 8월 중순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인원만 2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중 500여 명은 북한 인민군 후퇴 시 살해당했다고 한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일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 3일 광주에 진주할 수 있었다. 미처 광주를 빠져나가지 못한 좌익계는 무등산, 불갑산, 지리산 등으로 입산하여 10월 중순까지 광주시내에 출몰하여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달아나는 등 끊임없는 저항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국군 제11사단 20연대가 진주함으로써 광주의 치안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결과]
한반도에서 6.25전쟁은 냉전 체제의 고착화, 민간인 학살, 수많은 기관시설 파괴 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낳았다.
[의의와 평가]
광주광역시에서의 6.25전쟁은 다른 호남 지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민간인 학살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통치기구의 변모 이외에는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없이 일상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호남 지역 공산주의 비정규군[빨치산] 토벌의 중요한 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