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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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穀壤縣 |
영어음역 | Gogya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덕원 |
[정의]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광명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무열왕(武烈王)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전제 왕권(專制王權)을 형성하여 진골(眞骨)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경덕왕(景德王) 때부터 진골 귀족들의 세력이 다시 강화되자 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화(漢化) 정책을 실시하여, 757년(경덕왕 16)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잉벌노현(仍伐奴縣)을 곡양현(穀壤縣)으로 개칭하였다. 759년에는 관부와 관직명도 중국식으로 개편하였다.
[관련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한주(漢州) 율진군(栗津郡) 조에 “곡양현은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금주(衿州)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신라는 현(縣)에 소수(少守) 또는 제수(制守)나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조세의 징수나 역역(力役)의 수취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처리하였다.
[변천]
475년(장수왕 63)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침입하여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전사시킨 후 광명 지역에 잉벌노현을 설치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신라의 경덕왕이 잉벌노현을 곡양현으로 개칭하여 한주 율진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940년(태조 23) 금주로 개칭하였다.
[현황]
1990년 시흥 지역의 호암산성(虎巖山城)을 잉벌노현, 즉 곡양현의 치소(治所)로 추정하는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잉벌(仍伐)’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이와 관련된 조사·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