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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75
한자 社會運動
영어공식명칭 Social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하지영

[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개항기 동안 국권 수호와 근대적 변화를 위하여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 벌인 운동.

[개설]

개항 이후 일제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밀양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부터였다. 개항장·개시장에 거점을 두었던 일본인들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자 철도를 따라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밀양 역시 일본인들의 주요한 진출 대상지였다. 밀양에 정착하는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유발되었고, 이러한 일제의 침탈에 대응하는 밀양 지역사회의 근대적 움직임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밀양에서의 사회 운동]

개항기 밀양의 선각자들은 근대적 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의 침탈에 대응하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밀양 지역 최초의 근대학교는 1897년 교동(校洞)의 유생 손정현(孫貞鉉)이 설립한 사립 개창학교(開昌學校)였다. 개창학교는 1901년 공립 개창학교로 전환되었는데, 지금의 밀양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899년에는 부북면(府北面)에 화산의숙(華山義塾)이 설립되었다.

1908년에는 내일동(內一洞)사립 동화학교(同化學校)가 개교하였다. 특히 동화학교는 밀양의 항일운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학교인데, 김원봉(金元鳳)[1898~1958], 윤세주(尹世冑)[1900~1942], 김소지(金小池)[1898~1978] 등 1910년대 비밀결사 운동과 1919년 3·1운동, 1920년대 의열단(義烈團) 투쟁, 일제강점기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들이 수학한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동화학교 교장 전홍표(全鴻杓)[1869~1929]는 신지식을 통하여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동화학교는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사립학교령」에 따라 폐교되었다.

이 외에도 당시 밀양 내에는 신명학교(新明學校), 열성학교(悅城學校), 노동야학(勞動夜學), 상덕의숙(尙德義塾), 진성학교(進成學校), 대동학교(大東學校), 일신학교(一新學校) 등의 여러 신식학교가 설립되어 지역 내 근대교육을 담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강제로 차관을 들이며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밀양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5월 19일 유림들의 모임 장소인 연계소(蓮桂所)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던 밀양군 대표들은 그 며칠 뒤인 밀양 읍내 장날 ‘응향문(凝香門)’ 앞에서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일장 연설을 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관련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상서면(上西面), 하서면(下西面), 상남면(上南面), 하남면(下南面), 북면(北面),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 단장면(丹場面) 등 국내 여러 면에서 호응하였는데, 특히 사족이나 향반 계통의 유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단장면에서는 표충사(表忠寺)의 승려들까지 참가하였다.

개항기 밀양 지역의 사회운동은 전반적으로 사족이나 향반 등 전통 세력 중심으로 전개되는 추이를 보였다. 하지만 전통 세력의 영향력은 1910년대를 거치면서 상당히 약화되어 갔으며, 이후에는 근대적 교육을 받은 새로운 계층의 인물들이 성장하여 밀양 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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