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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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俊河墜落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계형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75년 08월 17일 - 장준하 추락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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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75년 08월 18일 - 장준하 추락 사건 원인 실족사로 발표 후 종료 |
발생|시작 장소 | 약사봉 계곡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
종결 장소 | 약사봉 계곡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장준하 |
[정의]
1975년 8월 17일 민주화 운동가인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추락사한 사건.
[역사적 배경]
장준하(張俊河)[1918~1975]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군사 독재 정권에 과감하게 항거하여 민주화 운동 인사들과 지식인들에게 상징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장준하 추락 사건이 의문사(疑問死)로 규정되는 것은 장준하의 사회적 위치와 정치적인 영향력이 막대했다는 데에 있다. 장준하가 거대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믿는 가장 큰 근거는 그가 당시 정권에 ‘빼내야만 하는 눈엣가시’였다는 점이다. 독재 권력에 맞서 꺾이지 않는 의지로 민주주의와 자유, 민권을 외쳤기 때문이다.
일본에 학병으로 끌려가 탈출, 임시 정부에서 활약하다 귀국한 장준하는 한때 김구를 도왔다. 1953년 월간지 『사상계』를 만들었는데, 당대 지식인 사회의 등불이었던 『사상계』는 권력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혔다. 언론 통제 등 왜곡된 현실 속에서 매서운 비판의 날을 세웠고, 5·16 군사 정변이나 한·일 국교 정상화 등의 실체와 문제점 등을 알렸다.
특히 유신에 대한 그의 활동은 정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973년 12월 그는 유신 헌법의 잘못을 지적하며 유신 헌법 개정에 나선다.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이끌던 그는 결국 생애 9번째 투옥을 당한다. 1974년 12월 병보석으로 출감한 그의 의지는 여전했고, 결국 그 다음해 8월 의문사한다.
[경과]
장준하는 감옥에서 나온 후 건강을 위해 백기완·이철우 등과 함께 등산길에 오르곤 했다. 1975년 8월 중순은 36℃를 오르내릴 정도로 무더웠기 때문에 등산은 무리였다. 장준하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림 산악회의 김희로[시인], 김용환, 김용덕[산악회장] 등은 굳이 등산을 강권하였다. 이에 장준하는 그리 높지 않은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으로 등산한다는 얘기에 이를 수락하였다. 그는 커피 보온병과 샌드위치 2인분을 배낭에 넣고 예전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버스에 올랐다.
장준하는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오전 11시 30분경 약사 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30여 분 동안 계곡을 따라 올라가던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등산로가 시작되는 계곡 상류에 여장을 풀었다. 이때가 12시 무렵, 곧이어 장준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행과 따로 떨어져 혼자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였다. 이것이 산악 회원들이 장준하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2시간 뒤 장준하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2시간 동안 장준하와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는 K 씨는 장준하가 홀로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뒤따라갔다고 한다. 12시 25분, 식사 장소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서 K 씨는 경계 근무 중이던 군인 2명과 얘기를 나누던 장준하를 발견했다고 한다. 군인들과 헤어진 뒤 K 씨는 장준하와 함께 산을 타기 시작해 약사봉 정상에 오른 뒤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K 씨에 따르면 하산하는 과정에서 장준하가 빨리 내려가자면서 길도 없는 가파른 벼랑길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장준하가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오던 중 나무가 휘어지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결과]
다음날 언론은 경찰 발표에 따라 장준하가 실족해 추락사했다고 보도했다. 장준하 추락사 후에 의정부 검찰 지청의 요구에 따라 의정부의 심외과 의사 심구복이 검시하였다. 그는 장준하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오른쪽 귀 뒤쪽에 있는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후두부 함몰에서 기인하였다는 소견을 발표하였다. 추락사라는데 기이하게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8월 18일 새벽 장준하의 시신은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상봉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그 뒤 함석헌, 김준엽, 문익환 형제, 계훈제, 백기완 등의 요구로 시신에 대한 정밀 검안이 실시되었다. 이는 검찰 등 수사 기관의 개입 없이 유가족의 요청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세 사람의 의사가 이에 참가했다. 한 가지 새로운 것은 양팔 겨드랑이 쪽에 피멍이 발견된 사실이다. 이는 결코 추락하면서 생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니며 두 사람이 양팔을 꽉 끼고 강제로 끌고 갈 때나 생길 수 있는 상처로 판단되었다. 또 하나는 허리 부분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다는 점이다. 전신에는 아무 데도 외상이 보이지 않았다. 의사들의 소견이 추락사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으나 긴급 조치 9호가 시퍼렇게 날뛰고 있는 시점에서 함부로 발표하기는 어려웠다.
경찰은 장준하 추락 사건을 실족 사고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검시뿐만 아니라 여러 정황상 실족사로 하기에는 의문점이 많았다. 추락 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 높이 12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준하 혼자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한 점, 사고 현장인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 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산 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등이다.
검찰 측에서 ‘등산 중 실족사’로 결론을 맺은 뒤, 당시 『동아 일보』는 장준하의 사인에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경찰은 단순 실족사로 서둘러 이 사건을 종결하고 이 사건에 의문점을 제기했던 『동아 일보』 기자를 구속했다. 유언비어를 유포하거나 사실을 날조해 왜곡된 기사를 썼다는 혐의로 유신 헌법 9조에 의거한 조치였다. 이후 장준하 추락 사건은 조용히 사라졌으며, 『민주 통일당보』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장준하 특집을 발간하는 등 진상 규명에 힘을 썼으나 당 기관지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장준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장례의 격식으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결국 가족장으로 낙착되었다. 가족장은 곧 동지장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는 8월 21일 아침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장준하가 갇혀 있던 서울 구치소 앞을 지나면서 운구 행렬은 잠시 멈춰 묵념을 하기도 했다.
국회에서 조만후(曺萬厚) 의원이 장준하 추락 사건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경기도 경찰청에서 재수사를 시작했지만 결론은 추락사로 다시 한 번 단정 지어졌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추락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람은 카메라로 장준하의 시신까지 촬영했다고 한다. 그는 약사봉 근처 마을에 사는 임 씨로, 그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의 형체가 높은 곳에서 추락한 사람으로는 믿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재수사 과정을 통해 사건 당시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얼마나 무성의했던가가 증명되었다.
[의의와 평가]
장준하와 뜻을 같이한 동료와 선후배들은 추모 비문에서 그를 “빼앗긴 민주주의의 쟁취, 고루 잘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라면서 언젠가는 그의 뜻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다시 장준하의 죽음을 기리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회와 민족에 대한 그의 삶이 더욱 귀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