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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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樂亭記 |
영어공식명칭 | Dokrakjeongg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양대길 34-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걸 |
제작 시기/일시 | 19세기 이후 - 현판의 기문이 1804년에 발간된 『경재유고』의 기문과 일부 같은 글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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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장처 | 연기향토박물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양대길 34-4[청라리 146] |
원소재지 | 독락정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101 |
성격 | 현판 |
재질 | 나무 |
크기(높이,길이,너비) | 120×60㎝ |
소유자 | 연기향토박물관 |
관리자 | 연기향토박물관 |
[정의]
조선 후기 독락정의 기문을 새긴 현판.
[개설]
독락정은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금강 변에 있는 누정(樓亭)이다.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를 지낸 임목(林穆)[1371~1448]이 고려 멸망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부친 임난수(林蘭秀)[1342~1407]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가묘(家廟)와 함께 세웠다고 전해진다.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이 이 정자를 다녀갔으며, 시문(詩文)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칠언율시 「공주 독락정(公州獨樂亭)」,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독락정기후설(獨樂亭記後說)」, 윤선거(尹宣擧)[1610~1669]의 칠언율시 「독락정에 올라(登獨樂亭)」 등이 있다.
[형태]
독락정기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평평한 직사각형의 판에 네 테두리를 결합하였다. 가로 120㎝, 세로 60㎝ 크기이다. 제목을 포함하여 40행 847자이다.
판은 흑칠 바탕에 금색의 글자를 해서체(楷書體)로 새겼고, 테두리는 주칠을 하였다.
[특징]
현판에 새겨진 「독락정기」는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 권81과 남수문(南秀文)[1408~1442]의 글을 모아 놓은 『경재유고(敬齋遺稿)』 권1에 실려 있다. 총 3개의 판본이 있는 셈이다.
『동문선』과 『경재유고』의 내용은 몇 글자를 제외하고 크게 다르지 않지만 『동문선』과 현판의 「독락정기」는 글자 또는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현판의 기문이 1804년에 발간된 『경재유고』의 기문과 일부 같은 글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현판은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蜚英中外 / 飛英中外
慶尙,全羅,忠淸三道之衝。江至此合流 / 慶尙,全羅,忠淸三道之江, 至此合流
拔出霄漢 / 拔出雲霄
賈奇靳異 / 賈奇獻異
村墟野壟 / 村墟野隴
屐舃之下 / 屐舃之間
心懷俱閒 / 心意俱閒
物化之可樂 / 物之可樂
尋孔孟所樂何事 / 尋孔顔所樂何事
尋聖賢之樂道 / 尋聖賢之樂
皆爲名韁所繫 / 皆爲名經所係著
得非勞苦其生者乎 / 得無勞苦其形者乎
自逍遙於山水. 聞者如此 / 自逍遙於山水. 間者如此
直與涑水之園 / 眞與涑水之園
[내용]
기문에 독락정을 세운 임목의 요청을 받아 기문을 쓰게 된 동기, 독락정의 경관, ‘독락’의 의미 등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목이 어떤 인물이고 기문을 서술한 저자인 남수문 본인과는 어떠한 관계인지를 밝히고 있다. 전 양양도호부사 임목이 정사를 잘 보아서 유명하였고, 남수문은 선친과 함께 일한 그를 아비로 섬길 정도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둘째 기문을 쓰게 된 동기를 임목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임목은 정자를 세운 곳의 위치와 경관을 설명하고, ‘독락’이라 이름을 지은 연유를 설명하면서 기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정자 위치에 대한 설명은 동문선과 현판 기록이 서로 다르다. 동문선은 정자가 “경상·전라·충청 세 길의 요충이고, 강이 이곳에서 합류한다”고 되어 있는데 현판에서는 “경상·전라·충청의 강이 이곳에서 합류한다”고 되어 있다. 금강과 금강 지류인 제천이 합류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므로 동문선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독락’이란 이름은 중국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지은 「독락원기(獨樂園記)」에서 따온 것이지만 즐기는 것은 이치[理]와 사물[物]로 각기 다르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독락정 기문을 쓰는 남수문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글이 변변치 못하고 독락의 의미도 잘 모른다고 겸손을 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치와 사물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능히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노니는 임목에게 독락이라는 편액이 어울리지만 명망을 짊어진 사마광이 독락원에서 한가로이 노닐지 못하였듯이 임목이 과연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덕담을 건네고 있다. 즉 남수문은 자신이 벼슬만 훔치고 분주하게 산다고 낮추면서 선정(善政)[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리는 정치]으로 이름을 드날린 임목이 다시 관직에 나가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임목이 ‘독락’이란 이름을 빌린 것은 사마광의 「독락원기」에 나타난 것과 같이 자신의 처지와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마광은 공자·맹자·안회가 말한 즐거움은 성현이나 왕공 귀족만이 도달할 수 있고, 자신과 같이 빈천하고 우둔한 사람은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임목이 관직을 자진해서 내려놓았기에 이젠 많은 백성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분에 맞게 생활하며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현판에 쓰인 독락정기 원문]
獨樂亭記
前襄陽都護府使林侯。早以政事。飛英中外。昔先君牧咸州。侯爲通判。先契甚密。余故父事侯有年。一日語余曰。吾家世居公之錦水上流。實慶尙,全羅,忠淸三道之江至此合流。故名其地曰三岐。所居南五里許。有斷山自北而南。行可二里許。峙爲小峯。脩篁茂松。葱蒨可愛。三江蜿蜒。自東蛇繞其下。吾嘗過而異之。試一登焉。北瞻元帥山。環如城廓。南望雞龍山。拔出雲霄。其東西諸山。或朝或揖。賈奇獻異者。不一狀。而村墟野隴。碁布遐邇。吾樂其奇勝。悼前之遺。遂於峯之左。築別業。且亭其上。於是。平沙漫流。天水一色。風而綠皺。月而銀波。以至檣帆魚鳥之往來浮沉。皆出屐舃之間。山之層巒疊嶂。巨麓長林。邇延野綠。遠混天碧。與夫雲煙之變于朝暮者。皆對几席之上。至若耕牧漁樵。歌謳相答。遊人行旅。傴僂絡繹於四野者。亦可坐而觀也。吾今休官而歸。幅巾藜杖。日登斯亭。心意俱閒。身世兩忘。獨釣于江。獨採于山。春朝之花。秋宵之月。吾獨詠之以爲樂。雲峯之奇。松雪之淸。吾獨觀之以爲樂。凡物之可樂者。吾獨以專之。洋洋乎若蟬蛻汚濁。遊於物外。四時之景不同。而吾之樂獨無變焉。絲竹之歡有時。而吾之樂獨無窮焉。敢竊涑水園名獨樂二字。以扁吾亭。以爲僭矣。然彼之所樂者。理也。吾之所樂者。物也。無嫌於同。請子記之。余於侯。不可以文拙辭。昔吾夫子甞曰。飮水枕肱。樂在其中。又稱顔子簞瓢陋巷。不改其樂。其所以樂則未嘗言。而二程乃令學者。尋孔顔所樂何事。亦引而不發。今侯乃獨樂其亭。而徵余言。夫旣曰獨樂。則尤非他人之所得知。矧余雖讀古人之書。其所謂樂者。漫不知何事。敢記侯之亭哉。雖然。其言曰。彼所樂者理也。吾所樂者物也。予聞理外無物。物外無理。天地之所以高深。山川之所以流峙。魚鳶之所以飛躍。草木之所以榮悴。與物乎耳目者。何莫非至理之所著者乎。是則由侯之樂。可以尋聖賢之樂。豈徒玩其景槩哉。且余竊觀今世士大夫。雖有田園可以自適者。然皆爲名經所係著。馳東騖西無已時。至有終身不歸其鄕者。間有歸者。亦不過執牙籌計錢穀。得無勞苦其形者乎。惟侯位不滿德。年未至暮。乃能謝榮宦脫世累。自逍遙於山水。間者如此。獨樂之扁。不亦宜乎。之亭也。眞與涑水之園。儷美於不朽者也。無疑矣。司馬公。負天下之望。故竟不得優游洛中。今侯亦負一時之望。則得以久擅斯亭乎。未也。若余竊位乎朝。無補於世。奔走夙夜。而猶不知止。能無愧乎。安得掛冠從侯於玆亭。誦涑水之記。詠坡仙之詩。而一窺其所樂之高趣乎。
直提學南秀文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