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405
한자 歷史
영어의미역 History
분야 역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집필자 김호동

[정의]

선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울릉군의 역사.

[선사시대]

울릉도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17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유물의 채집이 있은 이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등의 조사가 있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의해 울릉도의 고고학적 조사가 실시되었다. 1947년과 1957년에 김원룡 등에 의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3년에 김정기에 의해 보충 조사가 실시되어 1963년에 『울릉도』라는 보고서로 나왔다.

그 이후 1997년 서울대학교박물관과 1998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조사는 지표 조사나 간단한 발굴 조사에 그치고 있어, 체계적이고 정밀한 지표 조사와 시굴·발굴 조사를 통한 고고학적 층위와 의미를 가지는 유적과 유물을 확보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울릉도의 선사 시대를 확정해 언급할 단계는 아직 아니다.

울릉도에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유적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까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 유물은 지석묘가 북면 현포리울릉읍 저동 내수전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서면 남서리 고분군에서 성혈이 새겨진 지석묘 개석과 유사한 큰 바위가 발견되었다.

현포리에서 무문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무문토기의 기원은 본토의 철기시대 전기 말경, 아무리 늦어도 서력 기원 전후의 전형적인 무문토기로 추정된다. 이로써 울릉도에 주민이 들어온 시기가 서력 기원 전후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울릉도의 선사시대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기에는 무리이다.

[고대]

문헌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은 3세기에 나온다. 문헌상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에 기록된 기로(耆老)들의 이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함경남도 지방에 있던 옥저국 사람들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표류하여 수십일 만에 한 섬에 닿았다고 한다. 사람이 살고 있으나 언어는 알 수 없었고, 풍속으로는 7월에 동녀(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넣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512년(지증왕 13)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인 이사부(異斯夫)가 이곳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면서 울릉이 우리 역사에 포함되었다. 이사부는 강인한 이곳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섬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 울릉도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지증왕 이전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6세기 이후부터 통일 신라 시대에 걸쳐 축조된 것이다. 고분의 양식 및 도질토기 등의 출토 유물들은 신라 양식이다.

이것을 감안할 때 우산국지증왕 이후 이 땅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라에 귀복함으로써 신라의 인적 물적 지원하에 더 강력한 해상력을 확보하여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독도 및 그 근해는 물론, 우산국이 정벌하였던 대마도까지 이사부우산국 정벌 이후에도 신라에 복속한 우산국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현 산천조에 실려 있는 대마도 기록에 의하면, 대마도가 “옛날에 계림[신라]에 예속되었는데, 어느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비록 후대의 사료이지만 그에 대한 방증의 한 예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울릉도와 독도우산국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이사부의 정벌 이후 육지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930년(태조 13) 울릉도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파견해 방물(方物)을 바치자 태조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를 정조(正朝)로 삼았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이는 당시 각지에서 할거하던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부하던 추세에서, 울릉도도 본토내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본토와 울릉도가 긴밀히 연결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고려 초에 동해 멀리 위치한 울릉도를 지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울릉도는 우산국으로 불리면서 독자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고려의 군현제가 갖추어지는 현종조를 전후한 시기의 울릉도에 관한 기록에 우산국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산국이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산국은 1018년(현종 9)~1022년(현종 13) 사이에 여진의 침략을 받아 존립 기반이 붕괴되었다. 현종 때 여진족의 피해는 우산국뿐만 아니라 동해안 일대의 19읍에 걸칠 만큼 광범하였다. 이때 해당 군현 주민들의 조세를 감면해 주는 등의 조처가 단행되었지만, 우산국의 경우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는 우산국이 고려의 군현 체계 속에 포함되어 조세와 부역을 부담하는 군현민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으로 인해 우산국은 더 이상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주민의 대다수가 고려에 망명하여 고려 군현에 편적될 정도였고, 농기구의 지원의 명목이지만 고려의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산국이란 명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현종 때를 마지막으로 하여 우산국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우릉성 혹은 우릉도 내지 울릉도의 명칭이 보일 뿐이다.

고려 현종조 이후 울릉도에는 감창사(監倉使), 안무사(按撫使), 혹은 작목사(斫木使) 등이 수시로 파견되고 있다. 그것은 고려의 군현 체계상 목·도호부--영군·현--속군·현의 정연한 조직 체계는 아니지만 고려의 군현 조직의 하나인 주-속읍 체제의 한 형태로 울릉도를 편제 운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 및 향소부곡 등에는 그 지방의 향리들이 다스리면서 주읍의 수령 및 계수관(界首官) 관원과 안찰사 등이 수시로 순행하여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진족이 우산국을 한 차례 휩쓸고 간 뒤 이곳 울릉도는 고려의 군현 조직 속에 안정적으로 포함되지 못하였다.

의종 때에 울릉도에 군현을 설치하고자 명주도 감창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을 보내어 살펴보게 한 적이 있었고, 무신 정권의 최이가 동부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켰지만 결국 모두 중단되고 말았고 끝내 군현이 설치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 울릉도는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왜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자료에는 우산국·울릉도 등이 등장하지만 우산도, 즉 독도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려의 5도 양계제가 조선의 팔도 체제로 바뀜에 따라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의 속도(屬島)로 존재하였다.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서 조선 초 이래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을 육지로 옮겨 살게 했지만 항상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412년(태종 12) 강원도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11호 60여 인이 거주하였고, 소·말과 논은 없지만 콩과 보리를 경작하고 해산물과 과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울릉도에 살게 되자 태종세종 시기에 울릉도에 군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너무 바다 멀리에 있어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구의 침입이 염려된다 하여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쇄환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의해 안무사, 혹은 순심경차관(巡審敬差官)을 파견하여 섬을 조사하고 몰래 들어간 사람들을 끄집어내었으며 일본에게 우리 땅임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1471년(성종 2)에는 삼봉도(三峰島)[독도]를 조사하기 위해 박종원(朴宗元)이 파견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일본이 울릉도를 의죽도라 하여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다음 해에 이를 조사하려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였고 양국 간에 분규가 일어났다. 그 뒤 1693년(숙종 19)과 1694년에 일본이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하면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때 울산 어부 안용복(安龍福) 등이 활약하여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종식되었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수토 정책이 확립되어 2년 혹은 3년마다 월송만호와 삼척영장이 교대로 들어갔다. 1694년(숙종 20) 삼척첨사 장한상이 울릉도를 수토하였고, 1696년(숙종 22) 안용복이 다시 도일하여 호키주[伯耆州] 태수와 담판을 벌이고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게 하고 일본인의 출어와 벌채를 금지시키는 서계를 받았다.

1882년(고종 19) 이규원이 검찰사로 임명되고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었으며, 울릉도 이민을 장려하고 관선도장제(官選島長制)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울릉도에 16호 54명을 이주시켰다. 1895년(고종 32)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하였다. 1900년(고종 37)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 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누었다. 1906년(고종 43)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시켰다가 1914년 경상북도로 이속시켰다. 한편,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縣]에 소속시키고 해군의 보급 기지로 사용하여 독도 분쟁을 일으켰다.

[현대]

1949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됨에 따라 울릉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서면 태하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9년 5월 1일 남면이 울릉읍으로 개칭, 승격되었다. 2000년에 독도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독도리를 신설하였다. 현재는 1읍 2면 25리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울릉도는 최근 오징어의 흉작과 교육 여건의 어려움, 그리고 거듭된 자연 재해로 인해 인구수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의 인구는 1만 398명[남자 5,449명, 여자 4,949명]이고 세대 수는 4,848세대로 전년에 비해 약간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