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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435
한자 現代
영어의미역 Mordern Kore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호동

[정의]

1945년 8월 15일 이후 현재까지의 울릉도의 역사.

[연혁]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울릉도의 도사(島司)는 오타케 사쿠지로[大竹作次郞]였고 도청에는 내무와 산업 2개 과가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 울릉도청에는 초대 도사로 당시 남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서이환(徐二煥)을 12월 13일자로 임명하여 도내 일반 행정과 치안 행정을 수행하게 하였다. 일본인 관리들과 민간인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1948년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비로소 우리 정부 관리로서 울릉도 도정(島政)을 수행하게 되었다. 1949년 8월에 지방자치법의 발효로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지방자치단체인 경상북도의 관할 구역으로서 국가와 도의 사무를 위임받아 관장하였다. 독도는 울릉도와 경상북도 소속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당시 울릉도는 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그러나 육지와의 교통 단절로 식량 부족 등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해방 후 울릉도는 육지를 연결하는 정기선이 없어서 울릉도는 절해(絶海)의 고도(孤島)로 인식되었다. 해방 후부터 1962년까지 울릉도의 모습을 전하는 신문 기사는 밝고 희망찬 내용보다 절해의 고도의 내용을 구체적 사실로 전하는 슬픈 기사가 대부분이다.

[울릉도 종합개발]

울릉도가 일대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62년 10월 1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이 울릉도를 시찰하게 된 때부터다. 1963년부터 정부의 지원 하에 울릉도 자체 내의 교통선의 취역, 일주도로의 개통, 수력발전소의 착공 등 울릉도에 대한 종합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65년 4월 15일 목포를 방문한 자리에서 흑산도·완도·거제도와 함께 울릉도를 어업 전진기지로 만들겠다고 언명하였다. 동해안의 유일한 어업 전진기지가 된 울릉도의 저동항(苧洞港)은 1977년 3월 29일 울릉도 저동항 종합개발공사 착공을 시작하여 총공사비 93억원이 투입되어 3년만인 1980년에 완공되었다.

1963년 이후 일주도로의 수축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어 부분적으로 개통이 되었으나 일주도로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당초 1980년대 개통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나 예산 부족과 잦은 태풍 등으로 인해 도로가 유실되면서 일주도로의 완공은 늦춰지게 되었다. 일주도로는 2001년 9월 26일 39년만에 완공되어 개통되었다. 전체 구간 44.2㎞ 가운데 기술상의 문제와 환경 보존 등으로 유보된 4.4㎞의 내수~섬목 구간을 제외한 39.8㎞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이다.

[현황]

울릉도의 인구는 오징어 흉작, 교육 여건의 어려움, 거듭된 태풍 등의 재난 등으로 인해 매년 줄어드는 실정이다. 2009년 12월 인구주택 총 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릉도 인구는 10,398명에 불과하다. 울릉도의 산업은 관광에 희망을 두고 있으나 3시간 여의 긴 바닷길, 다양한 관광 자원의 미개발 등으로 인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울릉도민은 ‘하늘의 길’을 염원하면서 그 길의 개통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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