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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795
한자 社會
영어의미역 Society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봉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

[개설]

울릉도는 그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삶 자체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척박한 환경으로 식량 자급률이 매우 낮은데다 과거 육지와의 교통이 열악하여 식량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여름에는 태풍의 주요 이동 경로면서 겨울은 주요 폭설 지역으로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1960년대 산업화, 도시화의 영향 속에서 울릉도에도 본격적인 개발이 일기 시작하였다. 1963년도부터 본격적 종합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일주도로의 수축이 착수되고 울릉도를 왕래하는 배가 운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의 움직임에도 기술상의 문제와 예산의 문제, 또한 잇따른 재연재해의 영향으로 종합 개발 계획에 큰 차질을 주었다. 울릉도는 천혜의 환경을 통해 관광지로 개발되었으나 울릉도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극복해야할 열악한 환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역 특성]

경상북도 울릉군은 화산암의 오각형섬으로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217㎞ 떨어져 있다. 최단 거리에 있는 곳은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항이며 130.3㎞ 떨어져 있다. 울릉도는 44개의 섬[유인도 4개, 무인도 40개]으로 되어 있으며 3무(無), 5다(多)의 섬이다. 3무(無)는 도둑·공해·뱀이며, 5다(多)는 물·미인·돌·바람·향나무이다. 서식하고 있는 조류는 62종[텃새 24, 철새 38]이며 서식하고 있는 식물은 향나무, 후박, 동백 등 650여 종이 있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온난한 해양성 기후이며 강수량은 1,914.5㎜이다.

[변천]

1. 광복직후~1950년대

우리나라는 광복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울릉도는 그 지리적 영향으로 직접적인 포화를 입지는 않았으나 전쟁으로 인해 육지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어려워져 많은 고초를 겪었다. 당시 울릉도의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 자급률은 30%도 되지 않았다.

또한 중공군 포로의 배낭에서 울릉도에서 수출된 오징어가 발견되자 울릉도 오징어에 대한 수출 금지가 내려졌다. 울릉도 오징어잡이 배들은 오징어잡이를 포기하고, 대신 독도 근해로 나가 오징어보다 수익성이 좋은 미역이나 소라, 전복, 흑돔, 우럭 등을 잡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 와중에 일본은 독도에 자국의 영토라는 푯말을 꽂고 독도 주변에서 어로 작업을 하던 울릉도 어민들에게 일본의 영토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자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하여 1956년 12월 30일까지 울릉도민의 삶의 터전인 독도를 수호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전후 복구를 시작하고 산업화 시대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하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울릉도는 다시 생업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2. 1960년대~울릉도 종합개발계획 이후

울릉도의 종합 개발은 1963년부터 정부의 지원 하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선 울릉도 도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동양해운에서 350톤 급의 철선인 청룡호를 대한조선공사에서 제작하여 1963년 5월부터 월 5회의 운항을 시작하였다. 청룡호는 국고 보조 5할, 정부 융자 4할, 자기 부담 1할을 들여 축조되었다.

이후 동해안의 유일한 어업 전진 기지로 울릉도가 선정되면서 1977년 3월 29일 울릉도 저동항종합개발공사 착공을 시작으로 총 공사비 93억원이 투입되어 3년만인 1980년에 완공되었다. 전체 방파제가 1,933m로 20만㎡의 어선수용 수면을 형성하여 한꺼번에 어선 1천척을 수용할 수 있는 동해의 최대의 어항이 되었다. 그리고 울릉도민의 내륙 교통 편의를 위해 5억원의 예산으로 도동항을 집중 개발하였다.

당시 포항-울릉도 간을 청룡호, 동해호 2척의 정기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었으나 선착장 시설 미비와 풍랑 등으로 결항이 잦았기 때문에 8백 톤급의 쾌속 정기 여객선 취항을 위한 도동항의 집중 개발이 추진되어 1977년 5월에 도동항 선착장이 완공되었다. 같은 해 7월 808돈의 철제고속선 ‘한일 1호’가 취항하게 되었다.

[일반 현황]

2009년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의 면적은 72,897,360㎡이며 행정 구역은 1읍[울릉읍]·2면[서면·북면]으로 되어 있다. 인구는 10,398명[남 5,449명, 여 4,949명]이며 이 중 울릉읍이 7,395명[남 3,853명, 여 3,542명], 서면 1,589명[남 850명, 여 739명], 북면 1,414명[남 746명, 여 66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울릉군의 군청소재지가 있는 울릉읍은 인구가 가장 많고 관공서 및 사회 간접 자본 시설도 울릉읍도동리저동리에 집중되어 있다.

1. 사회 구성상의 특성

울릉도는 개척 당시 각지의 주민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이 매우 다양하다. 개척 초창기에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동해안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씨의 구성 또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1955~1956년에 작성된 『위문록』을 보면 261면, 81개의 성씨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성씨로는 월성최씨 15명, 밀양박씨 14명, 김해김씨 13명, 경주김씨 8명, 영양남씨 8명, 남양홍씨 8명, 김령김씨 9명, 전의이씨 8명, 오천정씨 7명, 경주이씨 7명의 순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990년대 이전까지 인구의 유동이 심해 어느 성씨가 우세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인구의 유동이 안정된 후 울릉군 내에 타 성씨들에 비하여 비교적 많은 인구 대비를 나타내는 성씨가 경주·김해 김(金)씨, 경주·월성 이(李)씨, 연일 정(鄭)씨, 밀양 박(朴)씨, 경주 최(崔)씨, 안동 장(張)씨이다.

2. 사회단체의 현황과 특성

과거 생존권을 위해 독도독도의용수비대를 직접 만들었을 정도로 울릉군민의 단결은 매우 강하다. 그래서 적은 인구수에 비해 여러 봉사 단체와 직능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울릉도 내 봉사 단체는 5개로 무의탁 소년 소녀가장 학자금의 지원, 주민 공동체 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한 모든 기반 사업 참여, 쾌적한 울릉도 환경을 만들기 위한 친환경 사업, 불우이웃돕기 활성화, 각종 축제 준비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울릉도 내 가장 먼저 생긴 봉사 단체는 울릉라이온스클럽으로 1973년 4월 25일에 설립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울릉청년회의소(JCI KOREA)가 1974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1984년에 새마을운동중앙회 울릉군지회가 설립되고, 1989년 바르게살기운동 울릉군협의회가 설립되었다. 1993년에는 울릉로타리클럽이 설립되었다.

울릉도의 직능단체는 각각의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영향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지원받지 못한 부분을 직능단체들이 대신하고 있다. 울릉군 여성단체협의회는 울릉도내 여성복지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여성복지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울릉군 여성단체협의회는 울릉도 사회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1,155여명의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노인회 울릉군지회는 울릉도 내 노인의 권익 신장과 봉사 활동 등 사회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현재 회원 수 1,062명을 기록하고 있다.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독도의용수비대의 얼을 이어받아 영토수호와 보전의 일환으로 독도를 푸르게 가꾸고 지키는데 있다. 1991년 9월 사회단체 등록 승인을 얻었고 현재 17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경상북도지체장애인협회 울릉군지회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 인식 개선, 사회 참여 확대, 재활 및 자립을 도모하여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사랑 실은 교통봉사대 울릉지대는 현재 36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동료 운전자의 심장병 자녀를 2명을 찾아 수술시켜 주었다. 울릉군 재향군인회는 재향군인 상호간의 상부상조를 통한 친목을 도모하고 국가 발전과 사회 공익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현재 1,11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울릉도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는 삶 자체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국전쟁 중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울릉도로 많은 내륙인들이 피난하였고 척박한 환경으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갔다. 이후 1963년 울릉도 종합개발계획 이후 항구를 넓히고 육지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배편을 만드는 등 울릉도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또한 국가 차원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노력에도 미흡한 부분은 주민들 스스로가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러 직능단체를 설립하여 주민들 스스로가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며, 여러 봉사단체를 통해 군내 어려운 일을 담당하고 있다. 주민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 국가에서도 지역 정책의 차원으로 울릉도의 발전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고려가 요구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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