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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1373
한자 于山國-于海王-豊美女-
영어의미역 Tale of King Woohae and Pungminyeo in Usangu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호동

[개설]

지금의 울릉도에 있었던 고대의 소국인 우산국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기록된 내용은 거의 없다. 246년(동천왕 20) 중국 위(魏)나라의 관구검(貫丘儉)이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을 기록한 『위지(魏志)』에 “동해에 또 하나의 섬이 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이 우산국을 추측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 의하면, 우산국은 512년 하슬라주(何瑟羅主)[강릉]의 군주(軍主)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정복당한다. 이사부우산국이 천험을 믿고 신라에 귀복하지 않자 목우사자(木偶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이르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여 계교로써 항복을 받았다. 지증왕 대의 우산국 정복 기사 외에 고려 전기까지 역사서에는 우산국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구전되어 오는 설화 속에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와 왕비 풍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따름이다.

[우해왕과 풍미녀 이야기]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시절은 우해왕이 다스리던 때였다. 왕은 기운이 장사요, 신체도 건장하여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작은 나라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당시 왜구는 가끔 우산국을 노략질하였는데 그 본거지는 대마도였다.

어느 해, 우해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수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대마도수장은 앞으로 다시는 우산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항복 문서를 바쳤다. 대마도를 떠나 올 때 우해왕은 대마도수장의 셋째 딸인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삼았다. 그런데 풍미녀를 왕후로 맞이한 뒤로 우해왕은 백성 다스리는 일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사치를 좋아하는 풍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신라에서 몰래 노략질을 해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하 중에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거나 바다에 처넣었으므로 신하와 백성들은 우해왕이 무서워 한 마디도 못하게 되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라가 망하겠구나!”, “풍미 왕후는 마녀야”, “우해왕이 달라졌어” 하는 소문이 온 우산국에 퍼지더니, 드디어 신라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해왕은 그런 소문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신하를 바다에 처넣었다. 이를 본 신하들은 되도록 왕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풍미녀가 왕후가 된 지 몇 해 후 우산국은 신라에 망하고 말았다.

울릉 지역에서 우산국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풍미녀가 죽자 우해왕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뒷산에 병풍을 치고 백 일 동안 제사를 지냈다. 또한 왕비를 모시던 열두 명의 시녀에게 매일 비파를 뜯게 하였다. 「비파산과 학포 이야기」를 보면, 평소에 왕비가 사랑하던 학도 백 일 제사를 마치던 날 소리 높이 슬프게 울며 학포(鶴圃) 방면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외에도 우산국 최후의 모습을 전해 주는 이야기들이 사자바위투구봉, 비파산 등의 지명을 통해 전해 온다.

[우해왕과 풍미녀 이야기로 보는 우산국의 실체]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은 전해지는 과정에서 많은 윤색이 가해졌을 것으로 보이나, 문헌 사료에 보이지 않는 우산국의 실체를 전해 주는 이야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해왕이 대마도, 곧 왜국과 혼인동맹을 체결하였다는 점이다. 그 동맹관계는 우산국이 왜구의 노략질을 징벌하고 차단하기 위해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마도를 정벌하고 인질[풍미녀]을 획득하여 맺은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해왕은 신라의 변방을 공격하는 등 동해안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 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이 동해안의 해상권 장악을 노리던 신라에게 위기감을 가져다 주어 이사부우산국 정벌로 이어졌을 것이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신라의 변방을 공격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던 동해의 해상 강국 우산국의 존재를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은 그렇게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전설이 이야기해 주는 우산국의 역사]

우산국이나 우해왕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우해왕은 신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도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우산국은 멸망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 귀복하고, 신라와 연합 동맹을 구축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우산국을 정벌한 다음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지속적으로 조달하며 지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판단하에, 종래의 우산국 체제를 유지하여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삼국 쟁패전에 전념하는 한편 우산국으로 하여금 왜의 침략을 막는 전위 역할을 맡기고자 하였을 것이다. 특히 왜의 침략을 막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필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우산국은 신라의 지증왕 이후 울릉도에서 완전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라에 귀복함으로써 신라의 인적·물적 지원하에 더욱더 강력한 해상력을 확보하여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을 것이다. 이사부우산국 정벌 이후에도 독도 및 그 근해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산국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최** 시청각 자료 잘 보았습니다.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목우사자를 이용하여 우산국과 주변의 도서들을 귀속시켰다는 내용의 공부를 하다 우연히 이 사이트까지 오게 되었네요. 시청각 자료 덕분에 궁금증 해결하고 갑니다. 201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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