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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411
한자 于山國
영어음역 Usangu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소국
관련문헌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 있던 고대의 해상 왕국.

[명칭유래]

우산국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6월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 이사부조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사료에 나오지 않다가 고려 현종조의 기록에 다시 나온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우산국 명칭의 유래를 밝힐 수 없는 실정이다.

[형성 및 변천]

우산국은 오래 전부터 울릉도에 토착하여 생활하던 원주민에 의해 건국되었다. 천험에 의지하여 신라가 계교로써 겨우 복속시킬 정도로 동해상을 무대로 존재한 해상 강국이었다. 우산국은 512년(지증왕 13) 신라에 복속된 뒤 해마다 신라에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국이 신라에 정기적으로 공납을 바치는 관계가 성립된 것을 통해 삼국이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주변 지역과 맺은 복속 관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증왕 13년조에 의하면, 우산국은 면적이 사방 100리에 불과하나 지세는 험난하고 사람들은 용맹하여 신라 군주(軍主)의 위력으로도 쉽게 항복시키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 내용으로 볼 때 우산국은 군사적 강국이었고 수준 높은 해양 문화의 보유국이었다. 우산국이 해양 강국으로서 성장한 데에는 이러한 수준 높은 군사 문화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6세기 초엽 우산국이사부(異斯夫)의 침공, 즉 신라의 강압적인 타협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에 해마다 공물을 헌납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로 인해 우산국은 한 때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궤멸되지는 않았으며, 그 이후 도리어 더욱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신라가 우산국을 공격한 목적도 완전히 소멸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며, 동해안 지역으로의 고구려의 남하와 동예의 침략 등을 방어하고, 신라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기 위해 우호적 동맹 세력으로 삼으려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가 동해안 지역을 계속 확보하고 고구려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서는 군사 외교적으로 해상 세력 국가인 우산국과의 연대를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우산국도 신라의 선진 문화를 자국의 문화에 접목하여 발전시켜 해상 국가로 더욱 강성할 수 있었으며, 통일신라의 문화 수준에 거의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볼 때 양국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울릉도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지증왕 이전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6세기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고분의 양식과 도질 토기 등의 출토 유물들은 신라 양식이다. 이것을 감안할 때 우산국지증왕 이후 신라에 귀복함으로써 신라의 인적·물적 지원 하에 더욱 더 강력한 해상력을 확보하여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사부우산국 정벌 이후에도 독도 및 그 근해는 물론이고, 우산국이 정벌한 대마도까지 우산국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 산천조에 실려 있는 대마도 기록 중에서 대마도가 “옛날에 계림[신라]에 예속되었는데, 어느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은 비록 후대의 사료이지만 그에 대한 방증의 한 예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울릉도와 독도우산국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울릉도 지역에는 오늘날까지 우산국의 종말을 아쉬워하는 애련한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서 우산국과 대마도―왜인의 혼인 동맹을 상징하고 있는 우해왕과 왕비인 풍미녀의 혼인이 주목된다. 우산국과 대마도―왜인의 혼인 동맹은 왜구의 노략질을 근절하기 위해 그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맺어진 동맹으로, 그후 양국은 일정 기간 화평를 누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전설에 의하면 이사부우산국 정벌은 신라가 외적 방어, 즉 여진의 침략과 고구려의 압박 등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는 해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라가 당시 명주와 한동해 일대에서 여진의 침략을 차단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해상 세력이었던 우산국과 공동 방어망의 구축이 요구되자, 강제적 수단으로 양국의 동맹 체제 형성을 이룩하기 위해 우산국을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우산국이란 명칭은 계속 확인된다. 우산국은 고려에 방물을 바치고 있었다. 이것은 우산국이 고려와 문물을 교류하고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지속하겠다는 의사 표시였을 것이다. 우산국은 여진과 왜구 등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고 한반도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자체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적극적으로 귀부(歸附)의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 자립의 기틀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도 우산국은 한동해로 침범하는 여진족과 왜구 등의 외적을 방어하는 방파제적 구실을 했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1018년(현종 9)~1022년(현종 13)에 우산국은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그 존립 기반을 상실하였다. 현종 때 여진족의 피해는 우산국뿐만 아니라 동해안 일대의 19읍에 걸칠 만큼 광범하였다. 이때 해당 군현 주민들에 대한 조세 감면 등의 조처가 단행되었으나 우산국의 경우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것은 우산국이 고려의 군현 체계 속에 포함되어 조세와 역역을 부담하는 군현민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으로 인해 우산국은 더 이상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주민의 대다수가 고려에 망명하여 고려 군현에 편적되었으며, 농기구 지원의 명목이지만 고려의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산국이란 명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관련기록]

우산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이 약간 달리 표현되어 있다.

“(지증마립간) 13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해도에 있어 혹은 울릉도라고도 하거니와, 땅이 사방 100리로, 천험을 믿고 신라에 귀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되,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 위세로써 내복하게 하기는 어려우나 계교를 써서 항복받을 수는 있다’고 하고, 이에 목우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 권44 열전 이사부조]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동해 중에 순풍 이틀거리에 우릉도[지금은 우릉이라고 쓴다]가 있으니 주위가 26,730보이다. 도이가 그 해수의 깊음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거늘, 왕이 이찬 박이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이종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해 말하되,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으리라”고 하니, 도이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의 장관으로 삼았다.(阿瑟羅州(今溟州) 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周迴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로왕조]

두 사서의 기록은 이사부를 박이종, 지증왕을 지철로왕, 하슬라주를 아슬라주로 표현하는 등 이름과 지명을 달리 표현하였으나 지증왕우산국 정벌에 관한 내용이란 점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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