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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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完州 |
영어공식명칭 | The Korean War and Wanj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상원 |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6.25전쟁 기간 동안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빨치산의 완주 집결과 토벌 작전]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한 북한군은 1950년 7월 20일 전라북도 완주군을 점령했다. 그로부터 약 2개월 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반격을 시작한 국군은 1950년 9월 28일 완주군을 수복했으며, 퇴로가 끊긴 북한군 패잔병들은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등지로 숨어들어 빨치산이 되었다. 산악지대인 전라북도 완주군의 운주면,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일대에는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대부산과 대둔산이 위치한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은 충청도 남부지역의 북한군까지 들어와 빨치산 충남도당, 전북도당, 이현상부대까지 진을 치는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전주[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를 수복한 국군은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빨치산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의용대를 조직했다.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가천리[현 경천면 가천리]에서는 구재마을 출신인 황월주가 유격대를 조직해서 빨치산을 토벌했는데, 황월주의 유격대는 완주군 일대뿐 아니라 전라북도 임실군과 전라북도 순창군까지 나아가 군경과 함께 토벌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서는 이수돈이 송광자위대를 조직해서 빨치산에게 점령되어 있던 송광사를 수복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화심 마을에서는 오기성이 30여 명 대원들을 모아 자위대를 조직해서 빨치산들로부터 화심마을을 보호하기도 했다.
한편 빨치산들의 주요 근거지였던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951년 2월 의용대가 조직되었다. 전주에서도 별동대가 조직되어 동상면에 파견되었다. 토벌대는 동상면 대부산 고지에 부대 본부를 차리고 한달 간에 걸친 공방전을 벌인 결과 동상면에서 빨치산들을 모두 몰아냈다. 이후 동상면에서 퇴각한 빨치산들이 운장산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접하고 토벌대는 운장산으로 가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친 결과 운장산 일대의 빨치산을 완전 토벌하게 되었다.
[전쟁의 비극 - 좌우익 간 양민학살]
6.25전쟁 기간 중 좌익과 우익에 의해 번갈아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은 전라북도 완주군에서도 일어났다. 완주군이 국군에 수복되기 직전인 1950년 9월 26일 밤과 1950년 9월 27일 새벽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의 지방좌익들은 소위 우익 인사들을 체포 구금해서 신월리의 산골짜기인 괴비소로 끌고가 총살시켰다. 현재 확인된 피해자 수는 모두 17명이다.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민간인 수십 명이 빨치산으로 간주되어 총살되기도 했다. 1951년 4월 25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주민 40여 명이 국군에게 끌려가 경천저수지 인근에서 집단으로 총살되어 매장되었다. 1951년 4월 29일에는 남아 있던 신월리 주민 30여 명이 다시 국군에게 끌려가 빨치산이라며 총살을 당했다.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단지동에서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노인 3명도 국군에게 희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