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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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陶谷里務安朴氏集姓村 |
영어공식명칭 | Single-Clan Village of Muan-Park Clan in Dogok-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1리 번계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있는 무안 박씨 집성촌.
[개설]
무안박씨는 전라남도 무안군을 관향으로 하고, 박진승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도곡리 무안박씨는 1644년에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1555~1615]의 사남인 도와(陶窩) 박선(朴璿)[1596~1669]이 종택을 건축하여 영해면 원구리에 기거하던 맏형의 유가족을 이 마을로 이주시킨 후 박의장의 장남과 사남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무안박씨 무의공파의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입지]
축산면 소재지 마을이다. 마을 우측으로 통과하는 국도 제7호선과 축산항으로 가는 국가지원지방도 제20호선이 만나는 삼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동편에 축산면사무소가 있고, 마을 앞으로는 축산천이 흘러 동해로 빠진다. 대소산 자락의 나지막한 야산 기슭에 주택이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다.
[명칭 유래]
신라시대에는 축산항의 포구가 현재의 도곡1리까지 이어져 배의 왕래가 많았다고 해서 번개[樊浦]라 칭하였으나, 점차 토사가 누적되어 뱃길이 끊기자 고려시대에는 번계(樊溪)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무안박씨가 입주하면서 포구를 돌려주었다고 해서 동명을 반포(反浦)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또 염전이 있던 포구, 즉 ‘벗개’가 변하여 '번개' 또는 '번포'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벗’은 소금 굽는 가마를 이르던 옛말이다. 도곡이란 지명은 옛날 이 마을 부근에서 독[옹기]을 구웠다고 해서 ‘독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하면서 도곡(陶谷)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번계, 복두미와 효촌[현재 도곡2리], 하반동[번계 아랫마을] 일부를 병합하여 도곡동이라 칭하고 축산면에 편입하였다. 1945년에 도곡1동과 도곡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무안박씨로 이 마을에 처음 입촌한 인물은 박선이다. 박선은 박의장의 넷째 아들인데 1620년경에 도곡에 저택을 마련하여 터전을 잡고, 1644년에 종택을 건축하여 영해면 원구리에 기거하던 맏형의 유가족을 도곡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로부터 도곡[번계]마을은 무의공 박의장의 장남과 사남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무안박씨 무의공파의 집성촌이 되었다.
[현황]
일제강점기인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의 취락(후편)』에 의하면, 1930년에 도곡1리[번포]에 거주하는 58가구 중 무안박씨가 50가구로 거주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2년에 간행된 『영덕군 향토사』에는 총 105가구 중 무안박씨가 86가구로 기록되어 있고, 2013년 8월 기준으로도 총 112가구 중 100가구 이상이 무안박씨였으며, 타성은 마을 동쪽 군부대 사택과 마을 앞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가게운영자 등 4~5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마을에는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영덕도곡동충효당[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영덕 흥교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염정(景濂亭)과 도계정사(陶溪精舍) 등의 옛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