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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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共産黨 |
영어음역 | Joseon Gongsandang |
영어의미역 | Korean Communist Par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단체|사회주의운동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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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25년 4월 17일 |
해체연도/일시 | 1928년 |
설립자 | 김재봉|박헌영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 출신의 인물들이 지도자로 활동한 사회주의 정당.
[개설]
1920년대에 들어와 청년지식층에서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는 이가 많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운동의 주된 무대는 국외에서 국내로 옮겨오게 되었고, 1925년 4월 17일 코민테른의 유일한 한국지부였던 조선공산당이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을 이끌었던 조선공산당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운동가 김재봉·권오설·이준태·김남수·안상길 등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설립목적]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대중을 조직화 및 의식화하고, 그에 기초하여 결정적인 시기에 대중 봉기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설립되었다.
[변천]
1925년 4월 17일 경상북도 안동 지역 출신의 김재봉이 주도하여 제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그 후 조선공산당은 일본 경찰의 거듭되는 대검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조직이 와해되고 결성되기를 거듭하여 제4차 조선공산당까지 탄생하였다. 그러나 제4차 공산당이 와해되고 공산당의 주요 3파인 화요파, ML파, 서울·상해파는 각자의 당이 유일한 조선공산당으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1926년과 1927년 국제공산당 가입이 승인되었던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에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승인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수많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항일투사들의 투옥과 희생을 하며 지켜온 조선공산당은 마침내 그 지부 승인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활동사항]
조선공산당은 총 4차에 걸쳐서 조직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 출신의 김재봉이 이끄는 화요파를 중심으로 1925년 4월 17일에 결성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에서 김재봉은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1925년 4월 18일에는 박헌영(朴憲永)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안동 지역 출신의 권오설은 중앙집행위원에 선정되어 선전부를 담당하였다.
1925년 11월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으로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재봉과 김찬은 안동 지역 출신인 이준태를 불러 강달영·홍남표·김철수·이봉수 등 5명에게 당을 인계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1925년 12월 강달영과 이준태,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제2차 조선공산당이 탄생하였다.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 이준태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부에 소속되었으며, 이후 당원의 입당과 간부 선임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제2차 조선공산당은 당의 선전사업과 당원 양성 훈련 등 여러 가지 사업을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빛나는 성과는 6·10만세운동이었다. 6·10만세운동의 기획자가 바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이었다.
1926년 초에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안동 지역 출신 당원이 확인된다. 유연화(柳淵和)와 연희전문학교 학생신분으로 신흥청년도동맹에서 활동하던 권오상(權五尙)이다. 이들은 각각 1926년 3월 조선공산당 제7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시대일보 야체이카와 학생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926년 6월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화요파를 중심으로 한 당원과 고려공산청년회원들 대부분이 검거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다. 안동 지역 출신의 권오설과 이준태도 다른 당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화요파가 주도한 최초의 국내공산당은 붕괴되고 말았다. 화요파가 궤멸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새롭게 조선공산당의 중심에 선 것은 엠엘(ML)파이다. 엠엘(ML)파가 중심이 되어 다른 조직을 통합하여 결성된 제3차 조선공산당은 1926년 12월 당시 국내외의 총 당원(수감자 95명 포함) 405명과 후보당원 약 138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대대적인 이론투쟁의 신호탄이자 신간회 설립의 주요한 계기가 되는 ‘정우회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어 1927년 2월에는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과 관련하여 활동한 안동 지역 출신의 인물로는 김남수와 안상길 등이 있다. 김남수는 제3차 조선공산당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었다.
통일공산당이었던 제3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자 제4차 조선공산당이 이를 이었다. 제4차 조선공산당에서는 서울·상해 합동파 조선공산당과 엠엘(ML)파 조선공산당이 별도로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ML파 조선공산당은 각도의 조직과 일본, 만주총국의 당과 공산청년회 조직들을 재건하고 야체이카들을 재정비하고, 학생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제4차 조선공산당은 3·1운동을 기념한 대시위 운동을 1929년의 10주년을 기하여 다시 추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3·1운동 기념투쟁에 필요한 격문과 전단 20만 부를 일본의 동경에서 인쇄하여 보내도록 하였으나, 일부가 발각되면서 대검거가 뒤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제4차 조선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제4차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안동 지역 인물로는 안상길을 꼽을 수 있다. 안상길은 조선공산당 경상북도 당 책임비서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안동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28년 10월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은 계속된 여러 차례의 대검거와 탄압으로 확고한 당의 영도 아래 효과적으로 투쟁하여 자신의 힘으로 민족 해방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은 선전적인 문화활동이나 실천적인 대중운동을 통하여 식민지 대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농민, 학생 등을 항일운동의 주체 세력으로 성장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동 지역 출신이나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